[김세희의 정치사기] 역사에서 정치사는 발전이 없다

김세희 2024. 6. 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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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1일 오후 서울역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규탄 및 해병대원 특검법 관철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지금의 정치는 허공에 헛주먹질하는 후진적 정치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지난 21일 초선의원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국회박물관에서 열린 초선의원 의정연찬회에서다. 나아가 김 전 의장은 극심했던 여야 대립과 거부권 행사 등을 거론하며 "All or Nothing의 정치"라고 꼬집었다.

김 전 의장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정치는 백성, 국민을 위해 했던 일이 전무한 "nothing"의 순간이 더 많았다.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쟁과 수취에만 골몰했고, 민생은 내팽개쳤다. 배를 곪던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봉기를 일으키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런 역사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시대별로 살피며 따라가 보자.

①통일신라 96각간의 난

768년(혜공왕 4년), 일길찬(一吉飡) 김대공이 동생인 아찬(阿飡) 김대렴과 함께 반역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왕도(수도 경주)와 5도·주·군 등 전국에서 귀족들이 '김대공파'와 '왕궁파'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96각간의 난이 촉발됐다. 3개월간 이어진 진골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고 남산신성 내 장창이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 김대공파는 33일간 왕궁을 포위했으나 왕군에 토벌됐고, 이후 왕궁파 귀족들이 포상을 받았다.

귀족들이 권력다툼을 벌인다고 해서 세금을 걷지 않는 건 아니었다. 궁핍해진 중앙 재정을 메우기 위해 수취를 한층 더 가혹하게 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농민들은 생산기반을 잃고 몰락했고,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삶의 위협을 받게 되자 반기를 들었다. 전국 각지에선 봉기가 일어났다.

<삼국사기>와 당시 금석문을 보면 "왕기(경주)밖의 주현은 반기를 든 곳과 복속한 곳이 반반이었고, 온 나라에 초구(도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나와 있다.

②고려 무신정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도 건국한 지 200여년이 흐르자 위정자들의 권력투쟁 양상이 극심하게 드러났다. 1170년(의종 24년) 발생한 무신정변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무신들은 이후부터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전을 20여년 간 벌였다. 가장 먼저 집권한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 이의민은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당했다. 4대 60여년 간 최씨 집권기를 거친 이후에도 김준·임연·임유무에게 권력이 이어졌는데, 대부분 당시 집권자를 죽인 뒤 탈취하는 형태였다.

무신들은 권력을 장악한 뒤, 수취체제를 강화했고 토지 탈점도 서슴지 않았다.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국가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급진성을 보여줬다. 전국적인 봉기를 모의했던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한 말은 역사에 남았다.

"무신정변 이후 높은 관직도 천한 무리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將相·장수와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될 수 있다.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③조선 붕당과 세도정치

조선도 이전 시대와 다르지 않다. 조선에선 사림이 집권한 후 붕당정치가 전개됐다. 초기에는 상호 견제와 협력, 공론이 중시됐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자기 붕당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현상이 일어났다.

집권 붕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같은당 사람끼리 혼맥과 학맥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했고, 권력을 세습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당이 저지른 실수와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성리학 경전을 깨알같이 인용해 내 편을 끝까지 감쌌다.

반대당에겐 관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잘못을 돌리며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정쟁 과정에서 서인과 연결된 인현왕후가 폐위됐다가 복위되고, 남인과 연결된 희빈 장씨가 왕후가 됐다가 다시 강등된 사건은 드라마화될 정도로 유명하다.

결국 정국은 경색됐고, 민생은 완전히 도탄에 빠졌다. 정조가 죽은 뒤 왕권이 약화되고 세도정치가 대두하자, 탐관오리의 수탈 등 부정부패는 심화됐다. 도망한 자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 어린아이에게 부과하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 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도한 군정으로 고통을 못 견뎌 극단적인 일을 저지른 사례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한시 애절양(哀絶陽)에는 한 백성이 죽은 아버지와 갓난아이의 군포까지 내야하자 스스로 음경(성기)를 자른 일이 나온다.

④동·식물이 된 현대의 국회

21대 국회는 '식물국회'였다. 아무런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거야가 의석수를 이용해 특검법 등 쟁점법안을 밀어붙이면 윤석열 대통령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다. 김 전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와 중재를 요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법안 강행처리→거부권→폐기 수순의 반복이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은 7번 거부권을 행사했고, 법안은 14개가 폐기됐다.

이런 정쟁 속에 국민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민생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AI기본법과 고준위방사성처리 특별법, '모성보호 3법'(남녀고용평등법·고용보험법·근로기준법 개정안), '구하라법' 등 다수의 법이 자동으로 폐기됐다.

법안 처리율이 가장 낮았던 20대 국회(37.8%)의 기록을 경신하는 오명도 썼다. 처리율은 36.6%다. 20대 국회가 어떤 국회였던가. 바로 '동물국회'다. 국회 의안과 앞에서 여야 의원이 고성과 멱살잡이를 벌이기도 하고, 회의가 열릴 때마다 아수라장이 됐던 그 때다.

참으로 비극적인 정치사의 반복이다. 시대에 따라 유형만 변했을 뿐이다. 권력다툼의 장은 '칼'대신 '말'이 자리를 잡았고, 백성들의 항의는 '봉기'에서 '투표'로 바뀌었을 뿐이다. 위정자들이 민생을 챙기지 않는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여야는 22대 국회도 정쟁으로 시작했다. 야권은 개원한 지 이틀 만에 장외투쟁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1일 서울역앞에서 '윤석열 정권 규탄 및 해병대원 특검법 관철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조국혁신당은 이날 대통령실 근처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채상병 특검 거부 규탄 집회'를 열었다. 윤 대통령 탄핵 언급도 점차 늘고 있다. 이에 국민의힘은 "22대 국회 시작부터 민생은 외면한 채 탄핵 공세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쟁에 빠져 허우적대다 끝나버린 21대 국회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더 이상 nothing의 역사를 쓰지 않길 바란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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