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 보릿고개]① "연구원 내보내야…" 교수도 학생도 위기감
(서울=연합뉴스) 조승한 기자 = "올해 연구비가 깎였는데 연구원을 내보내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인턴 지원자들이 많은데 기회를 주고 싶지만, 올해는 거절해야겠다, 10월이면 재료비가 다 떨어지는데 무슨 실험부터 중단해야 하나."
한국 과학자 가운데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표적 '스타 과학자' 김빛내리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단장(서울대 석좌교수)이 지난 4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교육부가 개최한 이공계 활성화 대책 태스크포스(TF)에서 밝힌 이 같은 고민은 정부의 올해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따라 연구자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올해 정부 전체 R&D 예산은 26조5천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14.7% 감소했다. 정부는 전년도에 R&D 예산으로 포함됐던 내용이 올해 비(非)R&D 예산으로 편성된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7.9%밖에 삭감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김 단장의 토로에서 보듯, 대학 등 연구 현장에서 체감하는 예산 삭감 여파는 훨씬 큰 게 현실이다.
대학 연구비 삭감 파장 본격화…'과제 영업' 나선 교수들
해마다 대학 연구자들의 주요 연구비 수입원인 기초연구과제가 올해분 선정을 마치면서, 이에 선정되지 못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연구비 보릿고개'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전에도 해마다 정부가 연구과제 협약을 갱신하기까지 1~3월을 '연구비 보릿고개'로 부르곤 했지만, 올해는 갱신하더라도 연구비 자체가 줄어 1년 내내 보릿고개가 될 것 같다고 연구자들은 우려한다.
기초연구연합회 총무이사인 오경수 중앙대 교수(약학부)는 실험실 예산 부족으로 연구원 1명을 7월까지만 근무하도록 했고, 12월에 1명을 더 내보내기로 했다고 연합뉴스에 말했다.
올해 과제비가 지난해에 비해 9%가량 삭감됐다는 오 교수는 "집단과제는 어느 정도 남아 있어 시차를 두고 연구원을 줄이는 등 상대적으로는 형편이 나은 상황"이라며 "다른 실험실은 연구비 부족으로 급격한 혼란을 겪는 곳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새 과제를 따내 연구비를 보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 교수는 "기초연구자들이 다른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주겠다고 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판에서 활동하려면 연구하던 것을 다 틀어야 할 수도 있다"며 "지원 폭이 넓어졌다고 하지만 현장 연구자들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과제에 선정되지 못한 대학 연구실은 내년 과제 선정까지 다양한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라며 이를 보완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제가 부족해진 교수들이 다른 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늘려 집단 과제에 참여하고자 이른바 '영업' 차원에서 올해 학회 참가가 늘어났지만, 비용 부담으로 학생 참가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러 학회 관계자는 전했다.
대학원생·출연연 학생연구원도 "수입 줄고 미래 불안"
위기감은 교수들도 교수들이지만 학생 연구원들에게 특히 심각하다. 인건비 감소, 연구 제한 같은 어려움이 커지면서 많은 이들이 과연 이공계 과정을 계속 이어가도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기 때문이다.
KAIST 대학원 총학생회가 지난 3월 5일부터 4월 3일까지 대학원생 696명을 대상으로 R&D 예산 삭감 관련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평균 월수입은 지난해에 비해 올해 10만원가량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올해 연구재료비가 줄었으며, 식비 절감·주거비 부족 문제 등도 발생했다고 답했다. 또 새로운 과제 제안서를 작성하는 등 연구 외 업무가 늘어나고 국내외 학회 참여 기회도 줄었다고 했다.
특히 이들은 소속 연구실에서 기존에 수행하던 국가 R&D 과제의 연구비가 20~29%가 줄었다고 답한 경우가 가장 많아, 연구 일선의 실제 삭감 폭이 평균 R&D 예산 삭감 폭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지만 조사 대상 가운데 41.2%는 연구비 삭감 이유를 누구에게도 설명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예산 삭감 여파로 연구실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대학원생은 "연구원별로 연구비가 차등 차감되면서 연구실 내 인원 간 불편한 감정과 불만이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생들은 학생 연구자로서 불안정한 수입 문제와 함께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KAIST 대학원 총학생회는 "가장 치명적 영향은 이공계 커리어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며 "심적인 충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연구 진행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도 학생연구원 규모는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의무 근로 시간을 줄이는 식으로 인건비를 조정하면서 처우가 악화하기는 마찬가지다.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가 출연연 학생연구원 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인건비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20명으로 절반이 넘었다.
학생연구원들은 "월급이 25% 줄었다", "사전에 전달받은 인건비보다 감액된 돈을 받았다"며 예산 삭감 여파가 크다고 답했다.
한 학생연구원은 "인건비가 제한돼 주 21시간에 해당하는 인건비밖에 받지 못한다"며 "전일제 대학원생 연구생활장학금도 학교가 아닌 출연연 학생연구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며 '사각지대'에 놓인 어려움을 호소했다.
shj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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