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MRI는 중국에 밀렸다, K-의료기기 글로벌 성공 방정식은?
“뛰어난 국산 의료기기 우리부터 적극 써야”
과기부·산업부·복지부·식약처 의기 투합
범부처의료기기사업단이 R&D, 규제개혁 지원
지난달 11일 중국 상하이 국가전시컨벤션센터(NECC)에서 제89회 ‘중국 국제 의료기기 전시회(CMEF 2024, 씨메프)’가 열렸다. 씨메프는 그해 중국 의료기기 시장을 한번에 파악할 수 있는 행사다. 올해는 더 특별했다. 중국 업체들이 미중 갈등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 전시회의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중국 의료기기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의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233조원에 달한다. 한국이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큰 시장이다.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 김법민 단장은 지난달 25일 인터뷰에서 “중국 시장을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에 토요일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며 “중국 의료기기 기술 발전에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 中,삼성전자도 고배 마신 CT⋅MRI 성공
김 단장에 따르면 올해 씨메프 행사는 ‘뉴테크⋅스마트퓨처’를 주제로 열렸다. 씨메프는 전 세계 30국에서 참가하는 국제 행사지만, 올해 참가 업체 부스에서 영문 브로셔를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어 간판만 있는 부스가 전시한 제품의 기술 수준이 상상을 뛰어넘었다. 7.0T MRI(자기공명영상), 968 슬라이드 CT(컴퓨터단층촬영) PET-CT(양전자방출컴퓨터단층촬영), PET-MR(양전자방출-자기공명영상장치)부터 암세포에만 방사선을 쏘는 사이버나이프까지 중국산 첨단 의료기기들이 대거 전시됐다.
한국 업체는 아직 MRI와 CT를 개발하지 못했다. 삼성전자도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김 단장은 “초음파 진단기기는 한국이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모두 중국산이 차지했다”며 “중국 업체들이 초음파 진단기기를 MRI와 CT 옆에서 ‘끼워팔기’ 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 의료기기 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의료 굴기(崛起, 우뚝 서다)’ 정책이 있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보건의료 산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원책을 쏟아냈다. 가장 먼저 존스홉킨스, 메이오클리닉, 클리블랜드 등 미국 최고 병원을 모델로 삼은 최신식 병원을 국가 주도로 세웠고, 이들 병원이 자국 의료기기 제품을 사용하도록 독려했다.
중국은 의료 굴기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유나이티드이미징(UI)을 꼽는다. 의료기기 연구에서 시작한 유나이티드이미징은 지난 2014년 중국 최대 병원으로 꼽히는 베이징 301병원과 공급 계약에 성공한 이후 빠르게 커나갔다. MD앤더슨, 워싱턴대, 듀크대 등 미국 병원들과도 손잡고 제품을 개발해 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국내 대학병원들도 유나이티드이미징의 CT를 쓴다. 김 단장은 “중국이 십여년 사이에 이뤄낸 기술적 성과를 보니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은 의료계, 규제당국 협력 힘들어
의료기기와 의약품의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딜레마가 따른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다 보니, 안전성을 입증하는 데이터를 많이 쌓아야 널리 쓰인다. 의료기기의 품질을 개선하려면, 임상시험을 통해 최대한 많은 오류를 찾아내 고쳐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환자의 목숨이 달린 의료 현장에서 오류를 내서는 안 된다. 이런 딜레마는 국내 의료기기 개발 현장에서 종종 목격된다.
국내 최초로 연속혈당측정기(CGM)를 개발한 진단기기업체 아이센스는 제품 성능 확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기존 혈당측정기는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서 나온 혈액으로 혈당을 잰다. 연속혈당측정기는 이와 달리 피부에 삽입해 둔 얇은 주사바늘에 전극을 연결해 짧게 1분 길게는 10분에 한 번씩 자동으로 혈당을 측정하는 기기다.
연속혈당측정기가 환자의 혈당을 잘 측정하는지 알아보려면 혈당이 높을 때와 낮을 때, 또 높았다가 떨어지는 과정도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의료진들은 “환자의 혈당을 높이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임상시험에 동의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허가 과정도 어렵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같은 규제 당국의 공무원은 계약직이거나 순환 보직이다. 의료기기 허가는 짧아도 5년이 걸리는데, 중간에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 제품과 기술을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은 단일보험 체계이기 때문에 건강보험(건보) 체계에 들어가야 사람들이 사용한다.
건보 체계에 들어가려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등 3개 기관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국산 의료기기 신제품이 이 과정을 다 뚫고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비율은 1%가 채 안된다고 한다. 남학현 아이센스 대표는 “국산 의료기기가 세계적으로 성공하려면 정부는 물론 병원과 의사도 좀 더 개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료기기사업단, R&D부터 규제 개혁까지 지원
다행히 우리도 중국의 성공 방정식을 따라잡고 있다. 남학현 대표는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과 협업을 통해 희망을 봤다”며 “사업단과 대화하면 ‘딱 하면 척’ 하고 알아들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아이센스는 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연속혈당측정기 ‘케어센스아이’ 상위 버전을 개발하고 있다. 남 대표는 이 제품으로 미국 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사업단은 고품질 국산 의료기기가 세계 시장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한국에서 사장되는 현실을 바꿔보고자 정부 부처가 의기투합해 만든 기구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4개 부처는 지난 2020년부터 오는 2025년까지 1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다.
사업단은 연구개발(R&D)부터 제품화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촘촘한 관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복지부, 식약처와 손잡고 의료기기 산업 규제의 틀을 만들고 효율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의 R&D 자금 지원이 ‘마중물’이라면 규제 개혁은 ‘추진 엔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범부처사업단이 올해 10대 과제로 선정한 국내 의료기기 강소 기업들은 사업단의 최고 서비스로 개방성과 함께 규제 기관과의 협력 사업을 꼽았다. 1기 사업단을 이끄는 김법민 단장은 고려대 바이오의공학부 교수이다.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텍사스 A&M대학에서 바이오엔지니어링으로 석·박사를 받았다. 해외에서 의료기기 산업을 경험해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단장은 “중국을 따돌리고, 한국이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리얼월드 데이터(실제 현장에서 사용되면서 쌓이는 임상 근거)’를 얻을 수 있는 의료 환경부터 빠르게 구축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중국이 관심을 두지 않는 틈새 기술을 찾아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1기 사업단은 오는 2025년 12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2기 사업단을 준비하고 있다. 김 단장은 “한국 기업이 개발한 우수한 제품을 의료 시장에 출시해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사업단이 기획한 2기 후속사업도 추진돼 K-의료기기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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