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귀한 고려왕 초상화 발견했는데 “땅에 묻어버려라”…세종대왕의 황당 지시 이유는? [사색(史色)]
[사색-71] “모두 땅에 묻어버려라.”
진귀한 유물이 발견됐을 때, 임금이 충격적 명령을 쏟아냅니다. 그림과 동상을 모두 땅에 묻어 흔적을 지우라는 것이었지요.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을 묘사한 동상이었으니까요. 오늘날에도 ‘국보’로서 자격이 충분한 유물입니다. 수백억 원은 훌쩍 뛰어넘을만한 작품이지요.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전임 정권에 대한 정치적 보복 때문이었을까요. 오늘날에도 전 정부의 유산에 지우개를 대는 행위는 자연스럽지만, 세종의 명령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왜 고려시대의 유물을 없앴던 것일까요.
“고려에는 화려한 그림과 석상이 마을 곳곳 가득하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남긴 기록입니다. 그의 눈에 고려는 ‘이미지’의 나라였습니다. 도성 안팎에는 불교 사찰이 발에 채이듯 많았고, 도교 사원과 토착 신들의 사당도 그득합니다.
주로 그림이나 도상과 같은 화려한 이미지로 각자의 신을 구현한 배경입니다. 아무래도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대다수일 테니 그림만한 포교 수단이 없었지요.
1273년 고려 임금 원종은 제주도와 전라도 광주 지역신들에게 상과 작위를 내렸습니다. 제주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신들이 적절한 역할을 해줬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가 토대로 삼은 유교의 교리에서 ‘이미지’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어서였습니다. 조선이 사대한 명나라 역시 조선의 ‘유교화’를 지속해서 관리 감독했었지요.
고려시대 지역 신들은 각자의 이름이 있고 가족도 있었던 인간적인 신이었습니다.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처럼요. 조선이 개국하면서 신령을 재현한 그림과 동상들이 제거됩니다. 정 모시고 싶다면 유교 방식의 ‘신위’로 제사를 지내라는 어명이 떨어지지요. 그림을 빼고 밋밋한 글자만 쓰인 나무패를 제사상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건 엄격히 제재받기 시작합니다.
고려시대의 그림과 상을 조직적으로 제거한 임금은 ‘성군’ 세종이었습니다. 아버지인 태종 때부터 시작된 성상제거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특히 세종은 산 밑에 단을 설치해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임금의 고유한 권리”라고 선포합니다. 무당이 산 위에 산신당을 설치해 민간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형적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임금이 산 아래서 제사를 지내는데, 감히 무당이 산 위에서 굿을 하다니요.
이들 신상을 모두 철거하고 유교식 제사로 대체하라는 주문이었지요. 고려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제사가 이뤄지던 개성 대황당과 국사당은 철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이 때 세종에게 “여러 동상과 초상화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약간 훼손된 고려 태조 왕건상과 2대 혜종의 상과 초상 등 진귀한 유물들이었습니다.
세종은 역시 원칙을 내세웁니다. 복원 대신에 각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자고 결론 내리지요. 고려 왕 십 여명의 초상화가 그렇게 땅에 묻혔습니다
세종이 불을 당긴 성상파괴운동은 조선 중기 유생들에 의해 계승됩니다. 여전히 민간에서 많은 백성들이 신상을 만들어 각자 제사(음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민속신앙의 전통이 남아있던 곳이 표적이 됐습니다. 옛 고려의 수도 개성이었습니다. 과거 500년 동안의 전통을 버리기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지역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실력행사에 나선 배경이었습니다. 1566년 명종 21년 100여명의 유생은 유서 깊은 기도처를 찾아 나섭니다.
후대 기록인 김육의 잠곡필담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됩니다. 김이도와 박성림이라는 두 유생은 당시 민중의 종교생활에 분노해 의기투합합니다.
“사람들이 병에 걸려도 약을 구하지 않고, 무당을 찾아 기도만을 일삼는다. 저것들(성황당)을 태워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성현의 도를 밝힐 수 있겠으며 긴긴밤에 요사한 기운을 없앨 수 있겠는가“”
명종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음사(공인되지 않은 무속적인 민간 제사)는 저절로 없어질 것인데, 어찌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성소들을 파괴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명종 시대 왕실은 개성의 신당에 보물을 보내 왕자 탄생을 빌 정도로 토속신앙을 가까이했습니다. 세종대왕 때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었지요.
불교 국가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가도 목이 잘린 불교 석상이 쉽게 발견됩니다. 지역 유생들의 횡포였습니다.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유교의 국교화는 임진왜란만큼이나 끔찍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성공회 선교사 J.R. 울프는 “한국은 종교가 없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숭배의 대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도 하지요. 그에게 있어서 글자만 덩그러니 쓰여있는 ‘신위’가 숭배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가 남긴 수많은 명작들이 사라져갔습니다. 문화재 소실의 비난을 외부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ㅇ고려는 불교 이미지와 각종 신의 석상으로 가득한 나라였다.
ㅇ조선이 유교를 기반으로 개국하면서 고려시대 유물들은 반달리즘(문화재 파괴행위)의 ‘표적’이 됐다.
ㅇ민족 성군 세종 역시 고려시대 임금의 초상화와 석상을 땅에 묻어버렸다.
ㅇ우리가 잃어버린 문화재는 이렇듯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곤 했다.
<참고문헌>
ㅇ한승훈, 무당과 유생의 대결, 사우,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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