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빈티지 ‘점프아워’ 시계… “이건 디지털인가 아날로그인가” [김범수의 소비만상]

김범수 2024. 6. 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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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계는 디지털인가, 아날로그인가.’

모든 디지털 시계가 반드시 배터리를 통해 전자식으로 구동되는 건 아니다. 전자시계를 넘어 스마트워치가 보편화 된 오늘날엔 ‘형용모순’(상반된 어휘의 결합)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1960∼1970년대에는 기계식 무브먼트를 탑재한 ‘디지털 시계’가 존재했다. 바로 ‘점프아워’(Jump Hour)라고 불리는 시계 장르다.

이 시계는 건전지가 들어간 ‘쿼츠시계’(Quartz)가 보편화 되기 전에 디지털 혁신에 대한 열망으로 탄생했다. 기계식 무브먼트에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있는 점프아워는 디지털 혁신으로 가는 과도기의 선물이기도 했다. 또한 아날로그 시계에 비해 시간을 매우 읽기 쉽고, 기존 시계와 다른 구조로 독특한 모습을 지니기도 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점프아워’ 시계의 유행

빈티지 시계는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마니아 영역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빈티지 시계 중에서도 ‘점프아워’(Jump Hour) 시계는 마니아 영역을 넘어 ‘오타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점프아워는 오늘날 사실상 사장된 시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점프아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침과 분침, 초침, 다이얼판으로 구성된 시계와 확연하게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1960~1970년대에 유행했던 다양한 '점프아워' 시계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베르니'(Verni), '루체른' 여성용, '조디악', 루체른 남성용 점프아워 모델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시계 바늘이 아닌 숫자가 적힌 디스크(원형판) 움직임으로 시간을 표시한다. 바늘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 시간을 나타내는 직관성이 특징이다.

또한 숫자로 시간을 알려주다보니 분침이 60분이 됐을 때 시침의 숫자가 마치 ‘점프’를 하듯이 바뀐다. 이쯤되면 누구나 눈치를 챘겠지만, ‘점프아워’라는 말 자체도 여기에서 나왔다. ‘시간‘(hour)이 ‘찰칵’(jump) 하면서 순식간에 바뀐다는 의미다.

'점프아워'(Jump Hour)의 무브먼트 구조.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보편적인 무브먼트와 다르게 숫자가 적힌 원형판이 돌아가는 구조다.
점프아워라는 장르가 처음 나왔던 1960~1970년대에는 신기술 그 자체였다. 시간을 시침이나 분침 등 바늘로 보여주는게 아닌 숫자로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기술이 탑재됐기 때문이다. 또한 시계에 들어가는 엔진에 해당되는 ‘무브먼트’ 구조도 기존 바늘 방식의 무브먼트과 확연히 달랐다.

마침 그 시대가 컬러 TV, 원시적인 컴퓨터 등 ‘디지털 혁명’ 태동기였기 때문에 숫자로 보여주는 점프아워는 혁신적인 시계이자, ‘힙(hip)’한 디지털 아이템 그 자체였다. 

그 당시 트렌드를 반영해 ‘파텍필립‘(Patek Philippe), ‘바쉐론 콘스탄틴‘(Vcheron-Constantin), ‘아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öhne), ‘까르띠에’(Cartier) 등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도 점프아워 모델의 시계를 출시하기도 했다. 특히 아 랑에 운트 죄네의 점프아워는 오늘날에도 기술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과거 혁신의 아이템이었던 점프아워는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에서도 앞다퉈 출시했었다. 좌측상단부터 '까르띠에', '아 랑에 운트 죄네', '파텍필립',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출시한 점프아워 모델.
◆사장된 ‘점프아워’… 이미지의 재해석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점프아워는 결국 기계식 구동으로 디지털 기기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사람들은 시계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는 과도기의 산물이라고 여긴듯 하다.

철저히 기계식 무브먼트로 구동했던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에 나온 점프아워를 보면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건전지 구동인 ‘쿼츠’ 방식으로 움직임을 구현했다. 다만 액정화면이 보급되기 전이기 때문에 시간을 액정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기계식 디지털’로 보여주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보면 점프아워는 아날로그 시계 특유의 아름다움도 없는데다가, 전자구동과 액정화면의 디지털시계, 더 나아가 스마트시계 등 ‘완벽한 상위호환'이 있기 때문에 “이게 뭐가 대단해?”라고 여기게 된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1980년대 건전지가 들어간 쿼츠시계가 보급되고, 전자식 디지털시계가 보편화 되면서 점프아워의 인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시계 오타쿠의 취향이 아닌 이상 디자인적으로 마이너하고, 성능면에서도 디지털·스마트 시계를 발끝만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점프아워는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 빈티지 시계로 인기를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이전 기사에 언급했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페바’(Feba)의 점프아워 시계를 착용하고 공식 석상에 나와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이크로 시계브랜드 '아스테리스크'에서 출시한 다양한 점프아워 시계들. 알래스카의 하늘과 하와이 화산, 워싱턴 올림픽국립공원 노을 등을 표현했다.
페바의 점프아워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중고 거래량이 적어 입수하기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루체른’(Lucerne), ‘조디악’(Zodiac), ‘허드슨’(Hudson) 등 1960~1970년대 잘 알려졌던 시계 브랜드에서 생산한 점프아워는 비교적 구하기 쉽다. 가격도 보통 50만원 이하로 큰 부담은 없는 편이다.

또한 시계에 시침 등 바늘이나 다이얼 등이 위치해야 할 공간이 덜 필요한 점프아워 특성상 시계가 아닌 한폭의 그림처럼 재해석하기도 한다. 시계 제조업체 ‘아스테리스크’(Asterisk)는 ‘알래스카의 하늘’, ‘하와이 화산’ 등의 그림을 담은 점프아워를 출시하기도 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기존 시계와 또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부로바'(Bulova)의 점프아워 모델과 내부구조.
◆부모님이 동경했던 ‘디지털’, 자녀들이 추억하는 ‘레트로’

국내에선 빈티지 시계 시장의 규모가 작지만, 유럽과 미국 등 서구권에서 빈티지 시계의 인기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서구권은 과거에 국내보다 소득 수준도 높은데다가 시계 산업이 발달한 만큼 빈티지 시계 유통량이 절대적으로 많은 이점이 있다.

또한 오늘날 서구권에서 빈티지 시계의 인기가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부모님 세대에 대한 ‘레트로’(복고풍) 감성일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부모님이 젊을적 유행했던 문화나 소품들이 다시 유행하는 것과 같다.

비교적 관리가 잘 된 다양한 점프아워 시계들. 좌측부터 '테너돌리'(Tenor Dorly)의 'Direct Lead Digita', '엘진'(Elgin)의 Golf Ball'.
빈티지 시계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빈티지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시계라고 볼 수 있다. 외국에서도 이 같은 빈티지는 ‘헤리티지’(Heritage)라고 해서 의미를 더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장에 나올 경우 이 같은 의미는 값어치로 환산되기 어렵지만, 간혹 이전 사용자의 유명세나 사연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책정되기도 한다. 빈티지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시계가 아니라 판매자를 사세요(Buy the seller, not the watch)”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부모님 세대가 점프아워 시계를 통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미래세대를 꿈꿨듯, 자녀들은 레트로 감성의 빈티지 시계를 매개로 부모님과의 추억을 되살리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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