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판 N번방 사건, 개인의 삶 파괴하는 ‘성적 인격 살인’ [김동진의 다른 시선]
‘지인 능욕’이란 용어로는 범죄의 심각성 표현 안 돼
(시사저널=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5월21일 최초 보도된, 텔레그램을 통해 발생한 허위 합성물 디지털 성범죄 사건, 일명 '서울대판 N번방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2020년 공론화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이하 'N번방 사건') 이후 4년 만이다. 이번 사건은 서울대 졸업생 등이 텔레그램을 통해 최소 61명의 여성 사진을 불법 합성해 유포 및 협박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주범인 A씨와 B씨는 서울대 동문으로, 주로 자신들의 학교 후배 등 여성 지인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허위 합성물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 및 다수의 피해자가 서울대 졸업생이어서, 서울대 총장은 5월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 수립과 피해자 보호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27일 기준으로 경찰은 총 5명의 피의자를 검거한 상태다.
'N번방 사건' 이후 가해자들 '지인 능욕'으로 전공 바꿔
피해자 중 한 명은 2021년 7월 텔레그램에 가입했을 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이 합성된 나체 사진과 불특정 다수 남성의 자위 영상, 합성한 본인 사진을 유포한 내역(단체대화방 내용 캡처) 등을 끊임없이 전송받았다. 그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단서가 없어 수사가 종결되었다. 2022년 우연히 유사한 피해를 본 사람과 만나게 되어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으나, 텔레그램에서는 범인을 잡기 어렵다며 수사가 종결되었다. 지난해 피해자들은 과거 'N번방 사건'을 보도했던 '추적단불꽃'의 원은지 활동가에게 연락했다. 현재 온라인 매체 '얼룩소' 에디터인 원은지씨는 2022년에 또 다른 피해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이미 그해부터 텔레그램에 위장 잠입해 범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경찰에서는 번번이 성과 없이 수사가 종결되었지만, 원은지 에디터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범인을 추적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미모의 아내를 둔 30대 남성 가장 역할로, 주로 밤부터 새벽까지 텔레그램에서 범인과 대화하며 신뢰를 쌓았다. 범인은 '같이 서울대 년들을 능욕하자'며 합성된 사진,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 각종 음담패설, 합성한 사진을 놓고 자신이 자위하며 사정하는 영상 등을 반복적으로 보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재수사가 시작되었다. A씨로부터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각각 서울 서대문·강남·관악경찰서와 세종경찰서에 개별적으로 고소했으나 경찰은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며 수사 중지·불송치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피해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단체 고소를 진행했고,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서 재수사를 결정한 것이다. 재수사는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이어가고 있던 원은지 에디터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텔레그램에서 함께 대화하던 범인은 원 에디터의 가상의 아내에게 집착하며 결국 그 아내의 팬티를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범인은 지하철역의 특정 장소에 팬티를 놓고 가면 자기가 가져가겠다며 실제로 지하철역에 나타나 팬티를 가져갔다. 혹시라도 본인이 아니라 연락책을 쓰고 있을 경우 그동안의 수사가 물거품이 될까 봐 원 에디터는 수사팀과 공조해 이후 그 일을 두 번 더 했다. 그동안 체포영장을 확보한 수사팀은 A씨가 세 번째로 팬티를 가지러 나왔을 때 그를 체포했다.
범인 검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원은지 에디터는 과거 'N번방 사건' 이후 가해자들이 '지인 능욕'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성착취가 아니라 지인 능욕이니 잡히지 않을 것이고 설사 잡히더라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해자들은 '이번 시즌 먹잇감이 누군가요'라고 하며, 각자 자신의 친구·가족·동료·선후배 등을 불법촬영하고 신상을 공개해야 초대받을 수 있는, 더 높은 수위의 합성물을 공유하는 상위 대화방에 들어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누구나 피해자 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
지인 능욕은 성착취 못지않게 피해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심각한 성범죄다. 자신의 얼굴이 포르노 사이트에서나 유통될 법한 사진과 영상에 그럴듯하게 합성되어, 마치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 인물이 나체로 여러 명의 남성에 의해 다리가 벌려진 자세를 하고 있거나, 성기를 포함한 온몸이 밧줄로 결박되어 있거나, 혹은 합성된 자신의 나체 사진 위에 모르는 남성이 정액을 뿌리는 영상 등을 받아 본다면, 그 심리적 충격과 공포는 쉽게 잊힐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10대부터 성매매를 하다 현재는 탈성매매 운동을 하고 있는 미국의 작가이자 활동가인 레이첼 모랜은 성적으로 평온한 상태란 매우 유약하고 섬세하고 다면적이어서 신체 접촉뿐 아니라 생각·충동·의도의 표현만으로도 훼손된다고 설명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반드시 신체 접촉을 하지 않더라도 눈빛, 작은 움직임, 말로도 성적 안전감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 역시 20대 초반 난생처음으로 '너, 나한테 먹히고 싶어?'라는 길거리 성희롱을 당했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잊을 수 없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감정은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장면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말·몸짓·눈빛만으로도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성적 안전감이라면, 이번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들의 삶의 안전감이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과 연대해온 원은지 에디터를 중심으로 일각에서는 '지인 능욕'이란 용어를 바꾸자는 움직임 또한 존재했다. 실제 범죄는 매우 심각한 정도인 데 반해, '지인 능욕'이란 용어로는 어떤 범죄가 행해지는지 짐작하기 어려워 범죄의 심각성을 가린다는 게 그 배경이다. 지난 4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실시된 용어 바꾸기 토론에서 학생들은 해당 성범죄의 심각성을 토론하고 '인물 특정 디지털 성범죄' '딥페이크를 이용한 온라인 성범죄' '허위성 미디어 성범죄' '성적 인격 살인' 등의 용어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다면, 이제라도 우리 사회는 '성적 인격 살인'이라고 부를 만큼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심각한 성범죄 앞에서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범인과 피해자들이 주로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이지만, 학력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범죄는 동일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보호받고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한 정의가 실현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안전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통해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이러한 성범죄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만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이를 근절하기 위한 강력한 법적·사회적 대응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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