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하나만 들고 다니더니 이젠 술병?”…예술가 집안 ‘미친 머리’ 맛에 사람들 홀딱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6. 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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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 그라츠의 와이너리. 피렌체 시내에서 택시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와인을 만드는 일은 예술일까요, 공예일까요? 와인은 예술품일까요, 공예품일까요? 여기에 대한 정답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애초 예술과 공예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인류의 역사 전반에 걸친 논쟁의 주제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예술과 공예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일찍이 서양 근대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예술을 ‘자급자족하는 표현’으로 정의하고, 공예에 대해서는 ‘목적을 지닌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단순화하면 목적과 자급자족,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갈리는 셈입니다.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칸트식 구분을 따른다면, 현대의 와인 양조는 공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와이너리가 매년 다른 조건 속에서도 달성하고자 하는 풍미 프로필인 ‘스타일’을 정해놓고, 양조자 역시 가진 기술을 활용해 해당 풍미 프로필에 최대한 가까워지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장에서 만나는 대부분 컨벤셔널(conventional) 와인이 일정 수준의 신뢰성을 기대하는 고객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이런 스타일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작부터 딱딱한 철학과 골치아픈 용어의 정의를 잔뜩 풀어 이야기한 것은, 오늘 와인프릭이 자신의 와인 양조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양조자 한 명을 소개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매년 자기 와인의 레이블을 직접 그리는 양조자. 테스타마타(testamatta· 이탈리아어, 미친 머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와인으로 유명한 비비 그라츠(Bibi Graetz) 입니다. 그는 지난 4월 열린 와인 수입사 와이넬의 초청으로 아트인더글라스 참석차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서양 근대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이마누엘 칸트. 그는 예술과 공예를 목적과 자급자족,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구분했다.
“커다란 붓 한 개만 들고 다녔어요”
비비 그라츠 와인을 조명하는 글과 평가는 어디에나 있고, 실제로 그의 와인은 어느 와인샵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의 분류 방식에 대입하면 공예 그 자체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비 그라츠의 태생적인 예술가 기질은 그의 와인을 공예품이 아닌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비비 그라츠는 양조자가 되기 전까지 실제로 그림을 그리던 프로페셔널 화가, ‘본투비(born to be)’ 예술가였죠. 그는 피렌체의 예술학교(Accademia delle Belle Arti)를 다니던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학교에 커다란 붓 한 개만 들고 다녔어요.”

그가 붓을 단 한개만 들고다닌 이유는 단순합니다. 남들과 다름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그게 외형이든, 수십개의 붓을 쓰는 친구들과는 다른 방식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든지요.

이러한 직관에 의존하는 그의 예술가적 기질은 와인 양조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비비 그라츠는 다른 양조자들과 달리 어떠한 양조학적 교육도 받지 않고 무작정 와인 양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양조를 시작할 때 난 아무것도 몰랐다. 첫 3년은 아주 유능하고 똑똑한 양조자를 고용했지만, 그 뒤로는 내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고작 3년 만에 수천년 역사를 지닌 양조의 정수를 깨우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절대’가 없는 와인 산업이더라도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죠.

바로 여기에서 비비 그라츠 와인의 스타일이 나타납니다. 정형화된 표준의 맛을 균질하게 뽑아내는 것보다 그때그때의 직관적인 느낌에 의지해 만들고, 그렇게 소비하는 와인이 바로 비비 그라츠인 셈입니다.

자신이 만든 와인을 들고 웃고 있는 비비 그라츠. 지난 4월 와인 수입사 와이넬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5년 만에 방한한 비비 그라츠.
와인이 들쭉날쭉했던 이유
평소 비비 그라츠 와인을 즐겨온 팬이라면, 그의 와인 품질과 스타일이 빈티지마다 들쭉날쭉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일부에선 그의 와인에 대해 ‘XX 빈티지 이후 아예 맛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제 값을 못한다’고 폄훼하기도 하죠.

비비 그라츠에게 이를 물었는데, 재밌는 이야기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와인에서 큰 갈래의 스타일 변화는 2009년과 2010년, 그리고 2019년과 2020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서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바로 악평이 몰리는 그 빈티지의 와인들 입니다.

2009년은 비가 많이 온 해였던 탓에 와인이 묽게 느껴지기는 수준이었고, 반면 2010년은 높은 일조량 덕분에 고도로 농축된 구조감 좋은 와인이 탄생했죠. 근데 평론가와 소비자의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평론가들은 당시 스타일과 다른 2009 빈티지를 평가절하, 2010 빈티지에 높은 점수를 줬지만, 오히려 소비자들은 부르고뉴 스타일에 가까운 2009년 빈티지에 지갑을 열었다는 겁니다. 그는 당시에 대해 “얻어맞은 듯했다”고 회상했습니다.

화가이기도 한 비비 그라츠는 자신의 와인을 위한 라벨을 직접 그린다.
그리고 이게 계기가 됐습니다. 사시까이아의 대성공 이후 토스카나에 유행하던 보르도 스타일의 골격이 곧고 강건한 느낌의 슈퍼투스칸 와인이 아닌 우아하고 여리여리한 와인을 양조하기로 방향을 전환한 겁니다.

두 번째 변화인 2020년은 비비 그라츠 와인의 주요 레인지인 꼴로레(colore)와 테스타마타(testamatta)의 밭을 명확하게 가르는 해였습니다. 그동안은 매년 작황이 가장 좋은 포도밭의 포도로 꼴로레를, 그 다음 포도로 테스타마다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부터는 오래된 와인, 올드 바인(old vine)들로 꼴로레를 만들고 해발 고도가 높은데다 북서쪽을 바라보는 사면에 조성돼 무척 서늘한 밭의 수확물로 테스타마타를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2020 빈티지 이후 꼴로레는 농축미와 응축된 복합미를 지닌 와인, 테스타마타는 좀 더 섬세하고 붉은 과실미가 풍부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비비 그라츠는 이에 대해 “2020 빈티지부터 와인이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비비 그라츠와 그의 와이너리 대표 와인인 꼴로레(왼쪽)와 테스타마타(오른쪽).
예술 작품 창작과 와인 양조
비비 그라츠는 왜 자신의 와인에 테스타마타(미친 머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는 자신이 예술가 집안의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술가들이 집에 많아서 그런지 보통 고집불통들이 아니었는데, 나 역시 학창 시절 내내 ‘넌 미쳤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와인에 자신의 별명을 이름으로 붙여준 셈입니다.

한편 그는 2016년부터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을 활용해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테스타마타 비앙코(bianco·이탈리아어, 화이트 와인)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토스카나 서쪽 지중해의 섬 질리오(Giglio)에서 키운 토착 포도, 안소니카(Ansonica)로 양조하는 것입니다.

안소니카는 사멸되어가던 질리오 섬의 토착 품종인데, 비비 그라츠 본인이 어린 시절 그 섬에서 자라면서 당시 농부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지식들을 기억하고 조합해 수령 100년 이상의 올드 바인들을 재배·양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질리오 섬의 포도밭.
마지막으로 비비 그라츠에게 예술과 와인 양조 중 어떤 게 더 어려운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예술”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예술가인 자신에게는 미치지 않고서야 결과를 보기 힘든 창조의 영역과 닿아있는 예술보다는 차라리 와인 양조가 쉽다고 느껴진다는 설명입니다.

지난 20년 간 남들이 뭐라고 하든 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세태가 어떻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의 자기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어온 비비 그라츠. 그의 와인을 마시는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맛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와인은 예술품일까요? 아니면 공예품일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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