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화책 때문에 딸 4명이 살해됐다…남미 뒤흔든 저주받은 걸작 [나쁜 책]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이 책은, 그러나 세계 만화사(史)의 넓은 시선으로 보면 그 가치가 사뭇 다릅니다. 세계 20세기 만화 연구서들의 참고문헌과 색인에서, 무수히 거론됐던 명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에스테르엘드의 ‘체 게바라’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만화책이 아닙니다.
출간 후 저자 본인과 4명의 딸, 그리고 사위들까지 납치·실종·살해되게 만든 역대급 문제작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이 저지른 의문사였는데, 지금까지도 그들의 최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저주받은 만화책’의 세계로 들어가봅니다.
그래픽 노블이란 ‘소설처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만화’를 뜻합니다. 가령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도 동명의 그래픽 노블이 원작이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은 풍부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는 큰 매력을 지닙니다.
작가 오에스테르엘드가 글을 쓰고, 알베르토 브레시아가 그림을 그린 이 책 ‘체 게바라’는 해외에선 제목 ‘Life of Che’ 혹은 ‘Vida del Che’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그가 볼리비아 군인들에게 결국 암살을 당한 최후까지의 장면들로 채워진 만화입니다.
체 게바라의 증조부는 독재자에 맞서 싸운 저항가였습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처음부터 혁명가로 길러진 건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체 게바라는 공부를 썩 잘했던 총명한 ‘의학도’였지요.
그는 ‘평생의 벗’ 그라나도스에게 여행을 제안받고 길을 떠납니다. 두 사람은 모터사이클에 몸을 싣고 남미 전역을 여행합니다. 하지만 두 청년이 목격한 건 아름다운 남미 자연의 풍광이 아니라 인간의 가난과 비참 그 자체였지요. 그건 ‘세계의 현재적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체 게바라는 칠레의 한 나병원을 방문했다가 가장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서서히 회심(回心)을 결심하지요. 콜롬비아,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등지를 떠돌면서 삶의 방향을 고민합니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체 게바라는 탁월한 카리스마와 남다른 지도력으로 ‘혁명 리더’의 지위에 오릅니다. 이후 라울 카스트로와 손을 잡으면서 1959년 결국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일조하지요.
그러나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체 게바라는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군에게 1967년 총살됐습니다. 이처럼 그래픽 노블 ‘체 게바라’는 고작 100쪽도 안 되는 분량으로 체 게바라 정신의 요체를 담아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아르헨티나의 서점에서 정식 출간됩니다.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초판은 매진, 완판됩니다. 체 게바라에 대한 사람들의 짙은 향수, 그리고 오에스테르엘드 문장의 힘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책의 위험성을 감지했지요. 책은 금서로 지정됩니다. 검열당국 공무원들은 그래픽 노블 ‘체 게바라’를 출판한 출판사를 급습했습니다.
그들은 이 책 전량을 회수하고 불태워버립니다. (초판이 세상에 거의 남겨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오에스테르엘드는 1977년 실종됩니다.
희생자는 작가 본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에스테르엘드의 네 딸도 한순간에 실종됐습니다. ‘다이애나, 베아트리체, 에스텔라, 마리아’라는 이름의 네 자매는 모습을 감췄고, 지인들은 그녀들이 실종되는 모습을 봤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또 그녀들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들(오에스테르엘드의 사위들)도 사라졌습니다.
증언자 아리아스 회고를 압축하자면, 오에스테르엘드는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방의 악명높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60세였음에도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다”고 그는 전합니다.
아리아스가 1978년 1월 출소했고, 오에스테르엘드를 봤다는 공식 기록은 시점상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그가 목격한 그의 모습은 오에스테르엘드의 ‘최후’에 가까웠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만화책 한 권을 출간한 결과로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일반화된 공식’의 이면에서 개별 사건을 하나씩 세밀히 관찰해보면, 그 모습은 결코 후대인인 우리가 단순화할 수 없는 세밀한 복잡성을 품고 있지요. 오에스테르엘드의 ‘체 게바라’ 필화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그건 오에스테르엘드가 ‘문제적 인물 체 게바라’를 묘사한 문장이 가졌던 힘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책 ‘체 게바라’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성이 커집니다.
그래픽 노블 ‘체 게바라’는 단지 체 게바라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추종하는 단순한 전기 만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전체 분량이 고작 93페이지에 불과하지만(한국어판 기준), 라틴 아메리카 가난의 근본 원인을 정면으로 해석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거친 필체의 검은 그림들 너머로 인디오와 광부와 농부의 비참한 생의 악순환이 그려졌고, 그 곁에서 ‘가난의 원인’을 압축하는 문장들이 독자의 심부를 건드립니다.
◎ “여기에서 의료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질병을 고치고 회복되길 바란다면 근본적인 뿌리를, 예컨대 수탈과 뼈만 남은 앙상한 팔의 원인을 고쳐야 하지 않겠나.” (36쪽)
또 아르헨티나 소설가 에르네스토 사바토는 이 책의 서문에서 체 게바라의 사망을 ‘깃발이 된 죽음’으로 은유하는데, 이 표현도 상당히 울림이 큽니다.
◎ “그의 죽음은 깃발이 된 죽음, 용기 있는 자의 영혼을 일깨운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의 노래에서 지적하고 있는 수백만의 ‘비겁한 겁쟁이들’에게 깃발이자 상징이었습니다.” (7쪽)
다만 오에스테르엘드는 체 게바라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데, 한 인간의 죽음을 이처럼 치열하고 단단하게 묘사한 문장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만 같습니다.
◎ “길게 누운 육신. 혈관에는 포르말린. 단단한 관에 그(체 게바라)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무덤에는 묘비는 물론 그 어떤 표시도 없었다. 이미 딱딱하게 굳은 주검.체 게바라의 피는 기아와 압제의 사슬에 저항하여 흘린 피의 강물에 한 방울을 더했다.” (90쪽)
아시아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사실 그는 20세기 만화사에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오에스테르엘드의 대표작들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지른 명저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59년 발표작 ‘El Eternauta(스페인어로 영원성이란 뜻)’이란 작품이었습니다.
오늘날 시점으로 봐도 상당히 독특한 설정의 작품인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한 외계인 때문에 생존이 위태로운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후안 살보는 이 과정에서 거대한 곤충이나 거대한 코끼리, 그리고 붙잡혀 ‘변형된 남성’ 인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곤충이나 코끼리들은 독재자로부터 조종당하는 정권의 하수인들을, ‘변형된 남성’은 매수되거나 굴복한 옛 저항가들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정권의 ‘총알 세례’를 환기합니다. (하지만 정치의 외피를 벗겨내더라도 상당히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의 묵직한 질문을 던지지요.
그래픽 노블 ‘El Eternauta’는 1959년 첫 공개 후 65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작품으로, 올해 혹은 늦어도 내년에는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외신에 따르면 작년 12월에 이미 촬영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만화가, 혹은 한때 알려졌지만 이제 완전히 망각된 줄 알았던 만화가오에스테르엘드가, 이 작품의 제목처럼 ‘영원성’을 부여받은 것이겠지요.
체 게바라의 ‘사망 30주기’였던 1997년 남미에서 불기 시작한 체 게바라 추모 열풍은, 2000년대 초 한국 서점가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서점가엔 온통 체 게바라 포스터가 붙었고, 특히 ‘체 게바라 평전’은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에스테르엘드라는 한 몰락한 만화작가의 이름은 별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 책 그래픽 노블 ‘체 게바라’는 세계에선 너무나 유명한 책인데도 중고서점에서 고작 3000원, 5000원에 판매되고 있고 또 그럼에도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때쯤, 이 책은 우리나라에 다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과 호흡할 수 있을까요?
한 권짜리 책의 가치는 단지 그 책에 매겨진 가격의 숫자가 아닌, 그 책에 실린 정신을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려 시도할 때 생기는 것만 같습니다. 오에스테르엘드의 망각된 책 ‘체 게바라’는 저 단순한 진실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 해외출장으로 지난주 휴재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송구한 마음 전합니다. 다음 주에는 앨리사 너팅 《탬파(TAMPA)》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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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를 선택하여 읽는다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讀者)적 행위다. 독자는 망각의 물결에서 의식적으로 책의 불온함을 제거해준다. 이 위대한 일은 독자만이 해낼 수 있는 과업이다.” (『나쁜 책』, 글항아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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