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에게서 처연함, 아이돌에게서 담대함이
여성의 얼굴
나혜석, ‘자화상’ 속 어두운 눈빛
시대와 맞선 선구적 여성의 삶
이재헌, 웃음기 뺀 ‘아이돌 Idol’
수도자같이 버티는 모습에 초점
“저를 자동인형이나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두 사람은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밑에 서 있을 때처럼 동등해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제인에어’ 속 제인의 말이다. 결혼을 약속한 로체스터에게 여성은 독립적이며 남성과 나란한 존재임을 주장한다. 근대 최초의 신여성 나혜석이 그려낸 자화상과 현대의 화가 이재헌이 담아낸 여자 아이돌의 표상을 만나본다.
“여자도 사람이외다”
나혜석의 ‘자화상’ 속 모던걸은 어둡다. 눈빛에 처연함이 담겼다. 꾹 다문 입술이 묻는다. ‘너는 신여성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여자로서 전람회를 열기는 여사가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오. 또 조선 미술계에 여자로는 일류라 할지라.” 1921년 3월18일 일간지에 실린 기사다. 그 당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나혜석의 개인전에 대해서다. 부유한 집안의 딸로 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3년 도쿄로 미술 유학을 간 최초의 여성이었다. 완벽한 출발이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지러운 시절에도 영예로웠다.
문득 1928년이란 숫자에 의문이 든다. ‘자화상’ 속 망연한 눈빛의 사연을 알 수 있으려나. 그 시기 나혜석은 세계여행 중이었다. 1920년 결혼한 남편 김우영과 1927년부터 1년9개월간 시베리아, 모스크바, 파리로 이동했다. 화가로서 꿈만 같은 여정이다.
‘자화상’에는 기품이 넘친다. 짙고 차분한 색조의 코트는 ‘모던함’을 더한다. 신여성임을 알려주는 옷차림이다. 본인을 그린 것이 맞을까. 얼핏 또는 자세히 봐도 서양 여성의 얼굴이다. 침울하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눈빛의 공허함을 덮지 못한다. 기울어진 자세가 불안을 부추긴다. 파리의 미술 아카데미를 다니며 최신 미술경향을 접하던 때다. 무엇을 예감하는 걸까.
타고난 자유로움은 위태로움을 동반한다. “현모양처론은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것.” 18살 때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에 나혜석이 게재한 글이다. 넘치는 자아는 유럽이라는 낭만적 지역에서 과오를 낳는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최린(훗날 친일파로 변절)과 사랑에 빠졌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이후 1930년대 경성 최대의 스캔들, 이혼을 당한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최린을 상대로 한 ‘정조유린죄’라는 위자료 청구 소송과 함께. 현재로 옮겨와도 자극적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다. (…)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라며 그 시절의 위선을 고발한다.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될 것”이라며 1931년 나혜석의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을 두고 혹평이 이어졌다.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같은 일은 엘리트 남성에게는 잘못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쏟아냈다. “여자도 사람이외다.” 더 고립되었다. 참된 말은 불편하다. 질서를 어지럽히기에. 앞선 사상은 외면받는다. 늘 그렇듯이.
우리의 예측은 자주 섣부르다. 쉽게 어떤 이의 마음을 짐작한다. 자기중심적인 엘리트 여성이었으나 어긋난 만남의 죄책감이 어찌 없었으랴. ‘자화상’ 속 포개진 양손이 애처롭다. 과장된 광대뼈에서 강함에 가려진 고독을 본다. 그녀는 숨고 싶지 않았을까. 반전은 없었다. 자식들을 볼 수 없었고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1921년 ‘매일신보’에 나혜석이 발표한 시(‘인형의 가’)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는 그녀가 시대에 무참히 패배했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행동하는 삶이었다. ‘자화상’ 속 눈동자에 눈을 맞춰본다. 나도 용기를 내고 싶다. 부당하고 두려운 모든 것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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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기 위해 강인하게 버티는
지난 3월 ‘핫플’로 소문난 서울 용산의 갤러리를 찾았다. 찬란하고 선연한 색 속 가녀린 여성들이 보인다. ‘예쁘네’라며 다가섰다 흠칫 놀랐다. 표정이 뭉개져 있다. 이재헌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화와의 첫 만남이다.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아이돌’ 시리즈였다. 아이돌 굿즈의 인기 품목인 포토카드를 보는 듯했다. 그중 한 작품이 유독 눈길을 끈다. 연작의 제목 그대로인 ‘아이돌 Idol’은 프릴이 달린 옷소매가 발랄하다. 하얀색은 청초함을 더한다. 팬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찬찬히 보니 어딘가 어색하다. 방긋함이 빠졌다. 여자 아이돌의 필요충분조건인. 비밀을 한조각씩 풀어가는 기분이다.
어린 시절 동화를 좋아했다. 몇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그림을 보는 것이 설렜다. 동화 속 소녀들은 공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고난을 거쳐 결국엔 행복해졌다. 어른이 되어 알았다. 신데렐라의 원래 이름은 ‘재투성이’이고 인어공주는 ‘물고기 아가씨’란다. 공주의 허상은 그렇게 벗겨졌다.
“수도하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이재헌 작가의 말이다. 2017년쯤 우연히 걸그룹을 선발하는 티브이(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단다. 이후 미학적 관점에서 아이돌 이미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다 보니 여성 아이돌의 모습 속 담대한 의지가 보였다. 성별을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답을 알고 싶었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돌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 이유다.
그의 말에 아이돌에 대한 나의 속내도 알았다. 연민이었다. 온갖 세속적인 욕망들에 가두어졌다. 가혹하다. 흠집 하나 없는 인형이기를 바라는 시선들. 끔찍하다. 추한 정념들이 요동친다. 그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춘다. 그림 속 소녀의 공허한 눈동자가 마음에 드리운다. 빛나기 위해 버텨내는 여자 아이돌의 모습이다. 동화의 이면 속 공주들이 여기 있다. ‘아이돌’의 서사다.
이재헌 작가는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력이 조금 독특하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미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싶은 절박함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아픔의 시간들을 통과하며 고민했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화를 그리며 회화적 실험을 이어간다. 붓질을 최대한 살려내 의상과 배경을 그린다. 인물을 의도적으로 쪼갠다. 뭉개지고 흐트러진다. 이재헌이 담아내는 여성은 성스럽기도 불완전하기도 하다. “모성에 대한 기억을 늘 품고 살아간다.” 그의 고백이다. 그는 여성에게서 희망을 발견해낸 것이 아닐까. 인형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아이돌이 보인다.
우리는 태어난다. 성별은 주어질 뿐이다. 각자가 던져진 생 안에서 분투한다. 바라본다. 그 길 위에서 여자라는 남자라는 이유로 아플 일들이 줄어들었으면. 묻고 싶다. 나혜석이 지금의 세상을 보는 마음을. 이재헌이 바라는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에 대해서도. 다시 계절의 끝자락이다. 당신의 자화상이 자주 웃음 짓기를.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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