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정신이 독립운동·반독재투쟁으로 이어졌다

김용희 기자 2024. 6. 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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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동학농민군 열전백낙규·이병춘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5월2일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 관람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용희 기자

백, 우금치전투 이후 개신교 투신
교회·학교 세우고 교육에 힘써
이, 최시형·손병희 등 교주 보좌
만세운동·임시정부 돕다 옥고

130년 전 동학농민혁명은 평등한 세상과 자주 국가를 꿈꿨다. 지금도 유효한 저항 정신의 본보기가 된 동학농민군의 투쟁은 3·1 운동과 해방, 4·19 혁명, 5·18 항쟁으로 이어져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동학농민혁명 130돌을 맞아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농민군의 발자취를 찾아간다.

농민군 아들, 제헌국회의원 활동

“무조건 교련수업 학점을 이수하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교련 반대 시위를 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어머니도 힘들게 사셨어요.”

지난 7일 광주 자택에서 만난 백운선(75) 호남대 명예교수는 1971년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을 다닐 때 ‘학원 병영화 반대 운동’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명분으로 대학 수업의 20%를 교련 수업으로 의무편성하고 군인을 학교에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학원 통제를 강화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백 교수는 홀어머니 밑에서 힘겹게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독재를 두고 볼 수 없어 시위에 나섰다. 주동자로 몰린 백 교수는 중앙정보부에서 고초를 겪다 강제징집을 당했다.

백 교수는 1974년 초 대학을 간신히 졸업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취업했지만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에 영문도 모른 채 또 끌려갔다. 반정부 활동을 금지한 긴급조치 4호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4개월 만에 대학 은사의 보증으로 풀려났지만 외국에 나가거나 대학교수 임용을 지원할 때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은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교수가 됐지만, 교사였던 백 교수의 어머니는 경찰 감시에 시달리며 정년이 되기 전 평교사로 퇴직했다.

하지만 백 교수는 반독재 운동에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에게 빚진 인생이었다고 했다. 백 교수의 할아버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백낙규(1876~1943)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런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백 교수는 회고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뒤 전북 익산지역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백낙규. 동련교회 누리집 갈무리

조그만 산골마을인 전남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에서 태어난 백낙규는 어렸을 적 병으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소년 가장 역할을 하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분노를 느끼고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소접주로서 우금치전투까지 참여했던 그는 패배한 뒤 일제의 감시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전북 익산시 황등면 동련마을에 터를 잡았다.

백낙규는 포목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딸 백형심이 1991년 남긴 수기를 보면, 동련마을 일대 땅을 모두 가질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었지만 술로 울분을 토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백낙규는 동학과 비슷하게 평등 사상을 강조하던 당시 개신교에 투신해 1900년 동련교회와 1907년 계동학교(1947년 폐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는 1919년 익산 황등 3·1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백낙규는 인근 교회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장날인 4월4일에 맞춰 만세운동에 나섰다.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남몰래 독립자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동련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4년 3월 강제로 해산된 뒤 이듬해 광복을 맞아 재건됐다.

자녀들은 백낙규의 사회운동을 이어받았다. 백낙규의 넷째 아들이자 백운선 교수의 아버지 백형남(1915~1950)은 계동학교 교장으로 일했고 지청천 계열의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백형남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처가가 있는 전남 목포로 피신했으나 같은 해 9월 북한군에 붙잡혀 세상을 떠났다.

동학농민군 백낙규의 손자 백운선 호남대 명예교수. 19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운동에 나섰다가 강제징집 피해를 당했다. 김용희 기자

백 교수는 202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유족 등록을 신청해 지난해 인정받았다. 백 교수는 “얼마 전까지 동학혁명은 동학난, 농민군은 동도 또는 동비로 불렸다”며 “동학과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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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학농민군 출신 이병춘의 1933년 7월1일치 부고 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임실 접주로 봉기, 무장 접주로 재건

전북 전주에 사는 이길호(62) 천도교 전주교구장은 동학농민혁명과 3·1 운동에 참여했던 할아버지 이병춘(1864~1933)의 뜻을 받들어 동학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 교구장은 지난해 10월 교구장으로 취임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천도교는 동학이 1905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름을 바꾼 종교다.

이병춘이 왜 동학에 가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충남 공주에 살았던 조부 이경화와 부친 이우홍은 각각 승정원 좌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한 고위 관료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북 임실로 이전했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이병춘은 5살 때 아버지, 12살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 등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교구장은 할아버지의 고달픈 삶이 그를 동학으로 이끈 것 같다고 추정한다. 1889년 동학에 입교한 이병춘은 1892년 삼례집회에서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을 처음 만났고 최시형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까이 지냈다. 1893년 교조 최제우(1824~1864)의 명예회복, 수탈 금지, 동학 인정 등을 요구하는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름을 올렸고 이듬해 3월 동학혁명 봉기 때 임실 접주(지도자)로서 농민군과 함께 봉기했다. 봉기 당시 이병춘은 충남 금산군 진산전투에 참여해 총에 맞고 위험에 빠졌으나, 관병이 동학군 주검을 불로 태울 때 도주해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1월 중순 우금치전투에 이병춘이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 이후 최시형이 이병춘의 임실 집에 9일간 몸을 숨긴 사실은 ‘천도교서’ 등으로 확인된다.

이병춘은 1895년 무장 지역의 접주를 맡아 최시형의 동학 재건을 도왔다. 최시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대 교주 손병희, 4대 교주 박인호를 보좌하고 초대 전주교구장을 맡는 등 동학 지도부로 나섰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전북 총책을 맡아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전주로 운반해 만세운동 준비를 마친 뒤 다시 상경해 서울 탑골공원 독립만세에 참여했다가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출옥 뒤에도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송금하다 다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을 수여하며 이병춘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동학농민군 이병춘의 손자 이길호 천도교 전주교구장이 해월 최시형 동상 옆에 섰다. 김용희 기자

손자인 이 교구장은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고난과 역경에 맞서며 동학의 광제창생(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과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 정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며 “발발한 지 130년이 지났지만 동학은 현시대에도 필요한 정신”이라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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