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 한강에서 열린 보트 경주 사진[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6. 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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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의 백년사진 No. 63

● 100년 전 한강에서 Boat Race가 열리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습니다. 여기, 흐릿한 흑백사진이지만 탄성이 절로 나오는 시원한 항공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습니다. 백년 전에 이런 앵글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강 위에 뜬 “보트”의 우승을 다투는 찰라/ 1924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설명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강상(江上)의 단정경조(短艇競漕)조선에서 처음 보는 “보트레스”대회는 만철사우회(滿鐵社友會) 운동부 주최로 얄궂은 여름 비가 오락가락 뿌리다 마다하는 어제 25일 아침 7시 반부터 한강 인도교 아래에서 성대히 열리었다. 강물 위를 육지로 삼고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신선한 여러 가지 재조가 많았으며 만철각과(各課)의 경주로부터 27종의 흥미진진한 경기가 마친 후 결승 경주가 있어 강상의 풍미 있는 경기도 성황리에 마치었다 한다. 경기의 성적은 내일에... 사진은 강 위에 뜬 “보트”의 우승을 다투는 찰라.

한강에서 단정(Boat) 경주(Race)가 열렸습니다. 만주철도 사우회 주최로 한강 인도교 아래에서 1924년 5월 25일 열렸는데 우선 26일자 신문에는 위의 사진을 먼저 싣고 경기 결과는 27일자에 상세하게 알려주겠다는 기사입니다. 27일자 신문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또 실려 있습니다.

滿鐵社友會運動部主催의第一回全朝鮮短艇竸漕大會를再昨二十五日午前七時半부터漢江人道橋下에서盛大히開催하얏다함은既報한바어니와經過中第一先着者는如左하다고

第一囘驛務二年(三分十九秒)▲二囘工塲旋盤(三分五十三秒)▲第三囘工塲製鑵A(三分一秒)▲第四囘工務事務所C(三分二十秒)▲第五囘十五俱樂部(三分)▲第六囘工塲體育協會B(二分五十秒)▲第七囘(日船)(一)金順三、金昊成(四分二十二秒)▲▲第八囘(各課代表豫選)(一)工務課(四分五十七秒五分之二)▲第九囘橫濱火災(二分五十五秒)▲第十囘(各課代表豫選)(一)機械課(四分五十六秒)▲第十一囘司計課타임不明▲第十二囘(各課代表豫選)▲第十三囘經理課B(三分十八秒五分之三)▲第十四囘(貸ボ│ト)(一)金仁植外二人▲第十五囘燃料硏究所(四分十四秒)▲第十六囘實業俱樂部(四分二十四秒)▲第十七囘庶務課B(三分十一秒)▲第十八囘鐵工土木科三年(四分十八秒)▲第十九囘記者團A(三分三十二秒)▲第二十囘殖產銀行(三分三十九秒)▲第二十一囘工塲體育協會B(四分五秒)▲第二十二囘工務建築係(三分九秒)▲第二十三囘工塲現塲組(三分七秒)▲第二十四囘京釜線(三分十七秒)▲第二十五囘(番外)(一)記者團B(三分十四秒)▲第二十六囘(番外)(一)遞信局(三分十七秒)▲第二十七囘(各課代表决勝)(一)機械課(四分五十二秒五分之四).

● 누가 항공 촬영을 했을까?

공중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지금도 규제의 대상입니다. 내 나라 내 땅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사가 함부로 비행기를 띄워서 촬영을 하지는 못합니다. 지금도 드론 촬영을 하려면 사전에 정부에 신고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물며 일제 시대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동아일보는 자체적인 비행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사진은 최소한 주최측인 만철 사우회 또는 비행기를 갖고 있는 기관의 도움을 받아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함께 탑승해 찍었거나 아니면 주최측이 촬영해 신문사에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은 날 매일신보에는 강변 선착장에서 한강 쪽을 지켜보고 있는 관중을 찍은 사진이 실렸습니다.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한강에서 펼쳐진 이색 볼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기자의 눈으로 볼 때는 선착장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 훨씬 좋습니다.

“보트 레이스”/ 1924년 5월 26일자 매일신보

● 신문에 실린 최초의 항공 촬영 사진

요즘은 드론의 가격이 저렴해져서 200만원 정도면 신문에 쓸 사진을 충분히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로서는 아주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겁니다. 드론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언론사 중에서 공중파 방송국과 중앙일보만 항공촬영용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회사들은 경찰이나 산림청 등의 협조를 받거나 청와대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에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사진을 찍는데 아주 제한적이었고 안전 문제로 서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기관의 헬기를 탈 경우 사진기자들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가 직접 지겠다는 서약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가 비행기를 운용한 것은 1962년부터입니다. 이 해 2월 13일에 경비행기 (세스나 185형. 6인승)를 1대 구입하고 항공과를 신설해 조종사와 정비사를 고용합니다. 1963년 6월 18일에는 경비행기 (스틴슨 L5. 2인승) 1대 구입하고 1965년 12월 12일에는 3인승 헬리콥터 1대를 구입합니다. 이상은 1968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9면에 실린, ‘격동 48년 동아 48년’ 특집 기사에 나온 내용입니다.

비행기의 이착륙은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는 수색 비행장에 격납고를 두고 기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수색으로 출동해 그곳에서 타고 내렸습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탑승한 것은 1984년에 입사했던 수습 기자들의 경험이 마지막입니다. 1996년에 입사한 저는 회사 비행기는 타지 못하고 선배들의 무용담만 많이 들었습니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약 21년간 자체 비행기를 운영했지만 항공 사진은 그 전후로도 신문 지면에 게재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지면에 나타나는 최초의 항공 촬영 관련 자료는 1933년 6월 ‘경성 부감기(俯瞰記)’입니다. 부감이라는 표현은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인데 영어인 ‘Bird Eye’가 훨씬 이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새의 시선과 같은 앵글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일한 조선인 비행사였던 신용욱이 살무손 2A2기를 전세 내서 서울 시내를 촬영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 해 8월에는 태풍참상을 항공 촬영한 사진으로 화보 지면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막상 이렇게 쓰고 나니 이 사진이 최초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다른 자료가 발견되면 다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땅 독도를 1964년 처음으로 항공촬영하다

비행기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비행기를 띄우지는 못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정부의 허락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독도를 처음 항공촬영한 것이 1964년인데 그 사진을 찍은 동아일보 기자는 군 전투기를 타고 촬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1964년까지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독도가 어떻게 생긴 섬인지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 없었으니까요. 우리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를 처음 항공 촬영하겠다고 나선 것은 고 최경덕 기자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개탄했던 최경덕 기자는 3년간 공군본부에 공문을 보냈고 회사를 설득해 1964년 12월 30일 전투기를 타고 독도 상공을 비행해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이틀 후인 1965년 1월 1일자 신문 1면에 실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동아일보와 정권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당연히 공군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협조 요청을 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협조 요청 공문을 3년간 보냈다는 것은 그런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겁입니다. 독도를 꼭 찍어보겠다는 사진기자의 제안에 동아일보 경영진이 화답했습니다. 최경덕 기자는 당시 동아일보 부사장이었던 일민 김상만 선생에게 면담을 신청해서 “군사정부가 동아일보를 싫어해서 항공촬영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리는 것 같다”는 공군 장교의 얘기를 전했습니다. 김상만 부사장은 최기자에게 촬영 섭외비를 줬습니다. 공군과 최기자 사이에 어떤 설득 과정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결국 공군은 최기자가 F86D 전투기를 타도록 허락했습니다. 당시 조종사는 박용태 소령이었고 비행단장은 ‘2천 피트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마라’고 명령했습니다. 막상 하늘에 올라가니 최기자가 준비한 카메라와 렌즈로는 독도가 너무 멀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갖고 있던 라이카 카메라 M3와 50미리 렌즈는 최고급 카메라였지만 전투기 위에서 바라 본 독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비행단장과의 약속을 어기고 최기자는 조종간을 잡은 박 소령에게 “딱 한번만 내려가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구름을 뚫고 독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을 선회하는 동아 셔터 속도 250분의 1초로 딱 10장을 찍었습니다. 당시 천관우 편집국장과 김상만 부사장이 크게 기뻐했고 동도와 서도가 공중에서 함께 보이는 최초의 독도 사진이 독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오늘은 백년 전 한강철교 위에 떠서 행사를 촬영했던 비행기를 상상하며, 신문 속 항공촬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특별하게 보이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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