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프리즘] 마음보다 몸이 아파요
초등학교 3학년이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담임 선생님도 바뀌고 친하던 친구와도 떨어져 새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별 어려운 일 없이 집에서 5분 거리 학교를 다니며 하루종일 뛰어놀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달 여가 지난 어느 날 2교시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마치 장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입술을 깨문 채 참고 있었다.
걱정하며 지켜보던 옆 친구가 “얘가 아픈 것 같다”며 선생님을 부르는 덕분에 인근 의원으로 갔다. 원장님이 진찰을 하면서 배 사진도 찍더니, 약을 지어주고는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라는 말씀을 하셨다.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오신 엄마를 따라 집에 와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니까 좀 누워 있어라”는 말을 들었다.
덕분에 그날은 숙제도 없이 종일 누워서 뒹굴거렸던 기억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새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면서 뭔가 잘 해보려는 나도 모를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20여 년 전부터 진료실에서 만나는 할머니가 한 분 있다. 저녁이 되면 숨이 차면서 가슴이 조이고, 등쪽 통증이 너무 심한 증상으로 오신 분이었다. 수없이 방문한 내과, 외과에서 받은 모든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 하는데 왜 이리 아픈지 모르겠다 하신다. 우울과 불안, 화를 다스리는 약을 먹고 상담을 하면서 많이 안정되었는데, 가끔 이름 모를 통증 때문에 급한 방문을 하곤 하신다.
해방 이전 부모를 따라간 외국 땅을 고향 삼아 살다가 국가 도움으로 영주 귀국하신 분인데, 자녀들과 그 가족들을 모두 현지에 두고 오신 터라 늘 자녀들에게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하다.
오늘도 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며 방문했는데, 마주앉은 의사 손을 잡고 젊은 시절 고생한 이야기를 한참 하시더니 눈물 한 방울 흘리고는 뒤돌아 나서는 뒷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래 묵은 마음의 상처, 근심과 울분 등의 만성 스트레스는 우울함과 불안함의 ‘감정 증상’과 비관적 사고 같은 ‘인지 증상’, 그리고 두통이나 통증 등 다양한 ‘신체 증상’을 일으킨다. 이 가운데 감정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진단을 받겠지만 마음은 괜찮은데 몸이 유독 아픈 분이 있다.
신경성 신체 증상은 통증, 어지럼증, 변비, 소화불량 등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내·외과적 진찰과 검사에서는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흔히 스트레스성 증상이라 부르고, 의사들은 이를 ‘신체 증상 장애(Somatic symptoms disorder)’로 진단하곤 한다.
우리는 흔히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자부심에 가득해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마음과 머리로 이를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 증상은 신경을 통해 마음과 몸으로 동시에 표현된다.
감정적으로 무기력하거나 우울하면 신경생리적으로 자율신경 부조화가 나타나고, 통증을 조절하는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신경호르몬이 불균형해져 결국 인체 항상성이 무너진다. 또한 세로토닌과 인터루킨, 사이토카인 등의 물질이 상호작용하면서 우울과 무기력이 통증으로 ‘전환’됨으로써 몸이 아파진다.
결국 스트레스·우울증으로 진단받게 될 소아청소년이 복통·두통으로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고, 고령인의 경우는 원인 불명 통증이나 이상한 신체 증상을 호소할 때가 흔하다. 또는 심한 건망증으로 치매 검사를 받으러 왔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는 가성 치매 환자도 있다.
만성 통증과 신체 증상이 있는데, 아직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학적 평가를 지속하면서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심리 스트레스, 그로 인한 감정적 변화를 평가하는 게 필요하다. 치료하기 위해 감정과 통증을 동시에 조절해 주는 약물을 먹으면서 상담하면 한결 편안함을 유지할 때가 많다. 전문가 역할은 약물 처방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컨디션 조절을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몸 아픈 것이 예전처럼 하나도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때보다는 나이도 많고, 그래서 회복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적절한 영양 관리와 운동을 하면서 마음 컨디션을 적절히 유지하는 연습을 한다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논리적이거나 지성적이지 않은 것 같다. 결국 감정적이고 신체적 반응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리라. 어린시절 배가 아파서 눈물 흘리던 나를 위해 걱정해주던 그 아이는 지금 무얼하고 지낼까 문득 궁금해진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dk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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