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초고이자 최종본인 오류 투성이 삶 [책GPT]
<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은 독서 후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기사 작성을 앞두고 텅 빈 노트북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의 압박에 괴로울 때면 떠올리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어떤 미완성된 생각이라도 일단 쓰고, 수십 차례 다시 들여다보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일이 글쓰기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입니다. 그 과정에선 초반의 수많은 결정이 번복됩니다. 오탈자와 논리적 모순은 꼭 뒤늦게 눈에 들어옵니다. 수정하고, 들어내고 다시 쓰면 됩니다. 글에 있어서라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다릅니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모두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 태어나는 동시에 막이 오른 무대 위 어떤 결정들은 썼다 지우기를 번복할 수 없습니다. 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생 그 자체라면 삶은 항상 밑그림과 같은 것. 그것은 퇴고가 금지된 채 실시간으로 출고되는 거친 초고입니다. 여러 겹의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도 살아볼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생뿐. 흘러간 시기의 다른 선택이 내어줬을 풍경을 이번 생엔 알 수가 없습니다.
양귀자는 소설 <모순>의 주인공이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 속에 간단하지 않은, 그러나 명료한 인생의 비밀을 숨겨뒀습니다. 비교도, 수정도 불가한 삶 속 최선일지 모를 선택을 내려보지 않은 사람은 시대를 불문하고 한 명도 없어서일까요. 삶의 모순적 면면을 그려낸 이 소설은 1998년 초판 이후 132쇄를 찍어낸 한국 문학계 최고의 역주행작으로 꼽히며 최근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선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어느 아침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주인공은 25세 여성 안진진. 그녀는 문득 되는대로 살아온 듯한 20여 년의 인생에 '부피감'이 부족하다 느끼고,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탐구해 원하는 곳으로 과감히 돌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뜻을 펼칠 첫 무대는 결혼, 배우자 후보는 두 남성 ①김장우와 ②나영규입니다.
김장우는 ‘희미한 사람’, 들꽃 사진을 찍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진작가입니다. 직경제적으로 여유롭진 않은데다, 부양해야 할 형도 있습니다. 강함보다 약함을,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애정하는 그는 이성이나 계획보다는 감성이 우선, 푸른 잎사귀 속 큰들벌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눈물을 흘리는 낭만주의자입니다. 자주 하는 말은 ”안진진, 괜찮아?“ 무엇보다도 그녀의 안위와 결정을 우선시하는 자상한 그를 진진은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 나영규는 '선명한 사람',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입니다. 김장우와 달리 경제적으로 풍족하며, 매사에 계획적입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일목요연한 그는 데이트 코스부터 결혼 계획까지 빈틈이 없습니다. 같이 있으면 편합니다. 단, 안진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기로 계획해서인 것도 같습니다. 그는 진진에게 좀처럼 "괜찮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진진이 그를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장단이 뚜렷한 두 남성을 두고 진진은 자신의 욕망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믿고 참고할 만한 최측근은 ①엄마와 ②이모, 한날한시 똑같은 생김새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지만, 결혼을 기점으로 정반대의 생을 걷게 됐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삶은 산전수전 공중전 그 자체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분명 사랑했지만 가난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의 폭력적 성향과 잦은 가출, 경제적 무능력은 가족을 궁지로 내몰았습니다. 그녀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뒤로 하고 시장에서 양말을 팔며 틈만 나면 가출하는 진진과 살인미수죄로 감옥에 간 골칫거리 남동생을 뒷바라지 합니다. 힘겨운 미션처럼 연속되는 불행을 수습하기 급급한 삶에 계획은 사치, 그녀의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 없이 갱신되고 수정됩니다.
이모의 삶은 여유롭습니다. 아버지와 180도 다른 부유한 집안의 건축가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계획적인 성향의 이모부는 자상하고 섬세하지만, 정각에 돌아오고 떠나지 않으면 사고라고 생각하는 기차 같습니다. 자식 둘은 일찌감치 먼 유학길에 보내 탄탄대로를 걷게 했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짜여진 가족의 시간표는 매일 순탄하게 굴러갑니다. 거기엔 이모가 주관을 개입해 수정할 여지가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다르게 말하면 단조롭습니다.
주목할 만한 건 진진이 누가 봐도 불운해 보이던 엄마에게서 분명히 느꼈던 생의 활기입니다. 원수같은 남편의 중풍을 간호하고, 동생을 감옥에서 빼내려 애쓰고, 수입을 늘려보려 잠을 줄여가며 일본어를 공부하는 엄마는 늘 펄펄 살아있었습니다. 그녀는 불행해서 행복했습니다. 고난을 헤쳐나가려는 몸부림에서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던 모종의 에너지, 불행이 삶의 부피를 늘려주는 광경을 진진은 목격했습니다.
반면, 모두에게 행복해 보이던 이모는 무언가를 거세당한 듯한 무기력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행복해서 불행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보장된 미래 속에서 온 힘을 다해 탐구하고, 헤쳐나가고 자시고 할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못 살겠다'고 생을 포기하고 싶을 법도 한 건 엄마 쪽인데,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괴로워하며 엄마를 부러워한 건 이모였습니다. '무덤 같은 평온', 거대한 무의미는 그 어떤 고통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진진은 뚜렷이 목격했습니다.
분명 김장우는 아버지를, 나영규는 이모부를 닮았습니다. 삶에 찌들어 보이던 엄마와, 우아한 백조 같던 이모. 두 삶의 겉과 속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진진. '생의 부피감을 원한다'고 외치던 그녀는 과연 어떤 길을 택하게 될까요? 엄마로 사는 동시에 이모로 살 수도, 나영규와 결혼하는 동시에 김장우와 결혼할 수도 없는 한 번의 생, 그 최종 선택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는 넣어두겠습니다. 단, 저자가 숨겨둔 생의 비밀을 살짝 들려드리자면 삶은 '모순'과 부조리의 복합체, 배워온 교훈과 되뇌인 다짐을 배반하는 일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을 담은 첫 시작부터 모순 투성이인 이 소설은 결말을 통해 "똥인지 된장인지는 먹어보아야 안다“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단 먹어볼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뿐이고, 세상에는 된장으로 만든 똥도, 똥으로 만든 된장도 있다고도.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양귀자는 작가의 말에서 '용기를 잃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번지르르한 평화가 숨막히는 감옥일 수 있고, 인생을 망치러 온 듯한 불행이 동시에 구원일 수도 있다는 것. 행복과 불행 뿐 아니라 모든 일이 동전의 양면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해석한 만큼의 생만을 살 것이며 그 해석은 스스로에게 달려있을 것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게 삶이라고 제목 지었지만, 절대적으로 나쁜 수(惡手)란 것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그랬듯 진진이 결혼 후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날아오는 변속구들에 맞서 그 자세를 씩씩하게 수정해 나가길 바랍니다. 실수와 오류 투성이일 미래에 부디 행복과 불행이 치우치지 않게 공존하길. 모순덩어리 안진진의 일란성 쌍둥이, 독자들 역시 사는 일이 버거울 때 이 소설과 함께 오래된 유행가 하나 흥얼거리며 일어설 수 있길.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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