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이 그린 요셉 보이스 초상이 서울에 [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2024. 6. 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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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Joseph Beuys (Beige Background), 1980.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 스크린. 50.8 x 40.6 cm.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DACS, London, 2024. 사진 : Ulrich Ghezzi.
‘팝 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의 작품이 타데우스 로팍 서울 포트힐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워홀의 작품이라고 하면 메릴린 먼로, 믹 재거 같은 팝 스타나 캠벨 수프 등 대중문화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이번 전시는 독특하게도 워홀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현대 미술가 요셉 보이스의 초상만을 여러 점 공개해 눈길을 끕니다.

워홀과 보이스의 첫 만남, 그리고 그가 어떻게 보이스를 작품에서 풀어냈는지. 타데우스 로팍 대표와의 인터뷰를 곁들여 소개합니다.

역사적 첫 만남, 사진으로 남긴 워홀

1979년 독일 뒤셀도르프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앤디 워홀과 요셉 보이스. 워홀이 ‘당신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고 묻고 보이스는 ‘그럼요(Sure)’라고 답했다. 사진 출처: 유튜브
워홀이 보이스를 그렸다는 점이 독특한 이유는, 제겐 두 작가의 작업 방향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이스는 나무 7000그루를 심도록 독려하는 캠페인을 퍼포먼스 작품으로 승화하거나,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자유국제대학’을 설립하고 강의 자체를 퍼포먼스 예술로 승화하고, 또 강의를 한 칠판을 작품으로 남긴 바 있는데요.

이런 그의 작업들은 과거 예술가가 회화나 조각을 만들었듯, 이제는 예술가가 사회와 시스템도 하나의 창의적인 작품으로 빚을 수 있다는 ‘사회 조각’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독일 카셀에서 1982년 시작해 보이스가 사망한 뒤 1987년 완성된 ‘7000 오크’ 작품의 2020년 모습.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옆 조그마한 현무암이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를테면 독일 카셀에서 선보인 ‘7000 오크’ 작품은, 광장에 현무암 더미 7000개를 쌓아 놓고 나무를 심을 때마다 돌을 같이 세워 7000그루를 채우도록 한 것입니다.

지방 정부에서 나무 7000그루를 심으려면 거쳐야 하는 관료제 등의 복잡한 절차를 떠나 인류가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하는 책임감을 ‘현무암 더미’가 보여준 것은 물론,

수십 년이 지나 현무암보다 나무가 점점 더 커지는. 살아있는 자연의 힘을 보여준 보이스의 대표작입니다.

이렇게 예술을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나 사회와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 보이스의 영향은 지금도 수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를 ‘20세기의 다빈치‘라고도 부릅니다.

미국 뉴욕 Ronald Feldman Gallery가 주최한 요셉 보이스의 미국 강연 시리즈 포스터. 사진: Ronald Feldman Fine Arts
그런가 하면 워홀은 미국의 상업 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예술가죠. 대중문화, 소비문화, 상품을 캔버스에 가져와 공장에서 찍어내듯 작품을 제작한 또 다른 거장입니다. 타데우스 로팍 대표는 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예술을 거울삼아 세상(미국)의 과잉을 비췄고, 요셉 보이스는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죠.”
가장 궁금했던 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분위기였는데요. 로팍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979년 두 작가가 처음 만났을 때 보이스가 워홀에게 다가가 ‘정말 만나기 어려웠네요. 다름슈타트에서 거의 마주칠 뻔 했다는데’라고 인사를 건넸다고 합니다.

워홀은 몇 마디 인사 후 ‘당신의 사진을 찍어도 되나요?’라고 물었고, 보이스가 ‘그럼요’(sure)라고 하자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어 역사적인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때 남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은 보이스의 초상을 여러 점 제작합니다.

펠트와 다이아몬드 가루

앤디 워홀, Joseph Beuys (1980-83), 시험 인쇄본(Trial Proof). 사진: 김민
갤러리에 가면 워홀이 이 때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어떤 고민을 거쳐 보이스를 표현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장 깊은 곳에 정식 판화를 찍기 전 테스트해 보는 시험 판화(Trial Proof) 연작을 8점 볼 수 있는데,

워홀이 보이스의 상징인 펠트의 느낌을 내기 위해 레이온 플록(rayon flock)을 사용한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로팍 대표는 “완성도가 높은 대형 캔버스 작품들도 웅장하고 신비롭지만,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색으로 여러분 실험했던 워홀의 고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해 시험 판화에 애착이 간다”고 말했습니다.

앤디 워홀, 요셉 보이스, 1980. 린넨에 아크릴과 다이아몬드 가루, 잉크 실크 스크린. 101.6 x 101.6 cm.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DACS, London, 2024. 사진: Eva Herzog
그런데 트라이얼 프루프에 사용된 펠트 재료들은 정식 캔버스와 종이 작업으로 오면 다이아몬드 가루로 변합니다.

제 느낌엔 다이아몬드 가루는 자본주의의 절정을 상징하는 듯한데, 보이스는 지극히 유럽적이고 인문적인 작가라서 독특한 재료의 선택이었습니다.

로팍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와 사회적 소비의 과잉을 드러내는 다이아몬드 가루는 워홀의 하이힐 시리즈에서 큰 주목을 받았죠.

그런 재료가 보이스의 이미지에도 사용된 것은 이례적이라고 느껴집니다. 한편으론 적합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전시장을 보면 다이아몬드 가루뿐 아니라 각기 다른 색깔의 실크 스크린은 물론 종이 드로잉으로도 초상을 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앤디 워홀, 요셉 보이스, c. 1980, 사진: 김민
그런 점에서 보면 워홀이 보이스에 매료됐고, 두 작가가 서로를 존중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워홀의 작품에서 추측할 때 그가 보이스를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로팍 대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워홀은 보이스를 예술의 살아있는 전설로 여겼습니다.”(As a living icon of art)

서로를 알아본 예술인들의 네트워크

1980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만난 앤디 워홀(왼쪽)과 요셉 보이스.© DACS, 2024; Photo: Tate
로팍 대표는 인터뷰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요.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처음에 작가가 되고 싶어 요셉 보이스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미술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저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 유럽 최고의 예술가였던 보이스는 비엔나와 인디애나를 오가며 강의를 했고 그걸 들으려는 학생들이 들끓었죠. 저 또한 그랬고요.

처음 강의를 들으러 간 날 이미 수용인원이 넘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지만, 제가 간절해 보였는지 겨우 끄트머리에 자리를 내줘 들어갈 수 있었어요.

처음 마주한 보이스는. 낚시 조끼와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 압도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대표. 사진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제공. © Marco Riebler
그런 다음 20대 초반인 1982년 로팍 대표는 보이스 스튜디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그가 작업하고 거주하는 건물이 있었어요. 무작정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급으로도 일하고 싶다고 했죠.

그때 이미 인력은 꽉 찼는데 마침 큰 프로젝트가 있어 운 좋게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작가가 되기엔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고, 근무 기간이 끝날 무렵 ‘뭘 할 계획이냐’는 보이스의 말에 ‘오스트리아에 갤러리를 열고 싶다’고 했죠.

이때 보이스와 워홀은 아주 깊은 유대를 나눈,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고. 보이스가 저를 워홀에게 소개하는 추천 편지를 써주었어요.

그렇게 떠난 뉴욕에서 워홀을 만났고, 워홀은 제게 ‘이 작가는 꼭 전시해야 한다’며 젊은 작가를 소개시켜 줬어요. 워홀의 말을 믿고 그 젊은 작가의 종이 작품 20점을 가져와 오스트리아에서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의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 작가는 장 미셸 바스키아 였습니다.“

워홀과 보이스, 바스키아로 이어지는 흐름이 놀랍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가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나와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좋은 예술이라면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는, 예술인들의 동료 의식도 느낄 수 있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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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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