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비극의 직관적 탐독 [주말을 여는 시: 강변북로]

하린 시인 2024. 6. 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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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강인한 시인의 「강변북로」
언제든 흐르고 있는 한강
도시가 품은 무탈함과 무상함
진솔하게 풀어내는 이 문장들

강변북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강인한
·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데뷔
· 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 등 다수
·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강인한, 「강변북로」, 詩로 여는 세상, 2012.

도시는 무탈하게 흘러가고 무상함을 품고 있다.[사진=펙셀]

강인한은 독서량이 풍부한 시인이다. 문학잡지와 시집에 실린 수천편의 시를 꼼꼼히 읽는다. 읽을 때 그는 시인의 데뷔 지면이나 데뷔 연도를 따지지 않고 엄정한 문학적 잣대로 읽는다. 그래서 옥석을 가려낸다. 가려낸 옥 같은 좋은 시는 시인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온라인 문학카페(다음카페 '푸른시의 방')에 '복사(복사기능)'가 아닌 '직접 쓰기'로 옮겨 적는다.

등단 57년의 시력을 가진 시인이 그 많은 시를 그것도 직접 옮겨 적었다는 것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순전히 고집이고 시를 향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다. 나태해지거나 시류에 시달리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올곧은 길을 가겠다는 선비정신을 보는 것 같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래서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를 읽는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가 가진 선비정신(시인정신)과 시적 역량을 오독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강인한'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자꾸 지우면서 시를 읽었다. 「강변북로」는 다양한 시적 발화와 방식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화법의 다양성, 소재의 다양성, 구조의 다양성이 시집에서 포착된다.

그런데 수사의 다양성은 포착되지 않는다. 조미료나 양념이 많이 들어간 자극적인 맛의 요리가 아니라 담백하면서 깊이 있는 맛을 낸 손맛의 요리 같다. 그것은 맛을 강요하거나 맛을 자랑하지 않고 맛의 정도正道만을 보여주는 장인의 솜씨다.

강인한은 지나치게 관조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주관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대상의 외연과 내면을 통찰한다. 대상을 통찰한 후 그것을 과장하지 않은 채 시로 풀어내는데, 읽고 나면 본질적인 면과 근원적인 면에 공감하게 된다. 「점화」를 예로 들면, 「점화」에 나오는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형상화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목을 매고 자살한 후 납골당에 안치되는 과정을 너무나 객관적으로 덤덤하게 언술한다.

"우리들 곁으로 둘씩 둘씩/ 손잡고 팔랑거리는 노오란 유치원생들./ 얕은 하늘에 나직이 떠서/ 새는 왜가리,/ 아랫도릴 벗고 알몸으로 날아가는 왜가리. //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걸며/ '삽입!'/ 가벼운 파열음을 비눗방울처럼 띄우며 웃던/ 여자,/ 목을 맨 게 겨울이었다. // 목덜미 아래로 가늘고 흰 손가락이 흘러/ 진초록에 금빛 네일아트가 빛났는데/ 여자의 몸속에는/ 세찬 여울이 있었나 보다.// 카네이션 두 송이 쓸쓸한 납골함 주변에/ 잔인한 시간을 호명하는 바람소리./ '삽입!'/ 분홍 입술의 파열음, 시든 꽃의 셀로판지가/ 투명한 소리를 낸다."(「점화」 부분)는 시의 후반부인데, 화자가 시속 '여자'를 무척 사랑했음을 암시돼 있다.

"가벼운 파열음을 비눗방울처럼 띄우며 웃던/ 여자"에게 "세찬 여울"이 찾아와 겨울에 목을 매게 된 상황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거기에 육체성을 암시하는 단어 '삽입'과 "아랫도릴 벗고 알몸으로 날아가는 왜가리"가 배치돼 화자와 '여자'가 친밀한 관계였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시했다.

강인한은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격정적인 감정이나 행동을 절대 표출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절제된 상태에서 그 현상이나 풍경 안에 화자의 진솔한 정서를 암시 기법을 통해 녹여내는데, 진실이나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과감성도 드러낸다.

「강변북로」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 이미지의 시가 많고 그 안에 예리하게 발견한 자신만의 시선을 배치한다는 점이다. 도시 안 유무형의 대상들이 갖는 비의悲意를 순간적으로 포착해 내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공간을 "고독한 물고기('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가 돼 산책하듯 그려내고 있다.

시인이 그런 산책에서 발견한 것은 사는 게 모두 "습관성 악몽('아껴신은 악몽')"이라는 것이다. 악몽이 연속인 삶을 그는 도시 곳곳이 보여주는 풍광을 통해 형상화한다. '강변북로'도 그중 하나다. 강변북로를 끼고 흐르는 강을 통해 시인은 또 하나의 '악몽'에 젖는다.

강의 "하류에서 발견"될 "그림자('악몽')"와 같은 악몽.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강은 비극을 내재한 도시의 '그림자'다. 밤에 더욱 더 선명해지는 그림자. 그런데 시 속의 강은 밤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간직한 비의悲意를 드러내지 않는다.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떨구고 갈 때가" 많아 낭만적인 분위기의 자태로 다가온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밤이 되면 강은 다른 의미를 간직한 채 흐른다. "검은 강"이 돼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검은 강'은 상처와 슬픔을 암시한다.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그 상처와 슬픔의 주인공이다. 그 비극과 슬픔을 간직한 채 시간이 흘러 강은 21세기를 맞았다. 하극상으로 죽은 군인이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본" 하늘에서는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가 열리고 있다. '죽음'과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채 흐르는 한강이 갖는 무탈함이 세월과 역사의 무상함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어디 강과 관련된 존재의 희생이 그 병사 혼자만의 일이었겠는가. 고대 삼국시대엔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걸 직관하고 있기에 화자가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술 한잔 나누며/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은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강인한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풍경, 특히 도시적 풍경에서 '악몽'과 '비극'을 직관적으로 읽어낸다. 그런데 그것을 과장하거나 흥분된 어조가 아닌, 그렇다고 지나치게 관조적인 태도가 아닌 입장에서 긴장감 있게, 진솔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강변북로」를 통해 도시 속 편린이 갖는 정서나 비의悲意를 자연스럽게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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