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는 미국, 치고 들어오는 러시아…출렁이는 아프리카

정의길 기자 2024. 6. 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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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
아프리카 각축전
지난 4월21일(현지시각) 니제르 아가데즈에서 시민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니제르 군사정권, 미군 철수 명령
러시아군, 힘의 공백 메울 채비
옛 프랑스 식민지 사헬 지역 국가
문민독재 전복 ‘반서방·친러’ 노선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이 기존 국제질서에 가한 파고로 아프리카가 출렁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여념이 없어야 할 러시아가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러시아를 봉쇄하려는 미국은 수세에 몰리고 있다. 블랙 아프리카의 입구인 사헬 지역(동서 방향 띠 모양으로 구획되는 사하라사막의 남쪽 주변 지대)이 그 무대이다.

우크라전 상황에서도 세력 확장

미국과 니제르는 니제르에 주둔한 미군을 오는 9월15일까지 철군하기로 합의한 성명을 지난 19일 발표했다. 지난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니제르 군사정권은 이미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군의 철군을 명령하고는, 러시아 쪽으로 접근했다. 러시아군이 수도 니아메 국제공항의 101공군기지에 배치됐고, 미군과 이 기지를 공유하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빚고 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러시아군은 별개의 병영에 있고, 미군이나 그 시설물에 접근할 수 없다”며 러시아군이 미군에 “위험”을 조성하지 않는다며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을 해명했다.

올해 초 로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이곳엔 60여명의 러시아 군사훈련 요원이 배치됐다. 최근에는 그 수가 더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정규군에 앞서, 러시아 용병인 바그너 그룹 대원들은 니제르뿐만 아니라 말리 등지에서 1천여명이나 배치돼, 대테러전을 수행하고 있다.

중동의 시리아 및 이라크 등 레반트 지역에서 패퇴한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무장세력한테 사헬 지역은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무슬림들이 많은데다,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광대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프랑스와 손잡고 대테러전을 수행하는 미국에 니제르는 가장 중요한 국가이다. 니제르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근원인 리비아와 북쪽으로 접경하고, 서아프리카의 중심 국가이면서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이지리아와 남쪽으로 접경하기 때문이다.

니제르에서 미군의 대부분은 수도 니아메에서 북동쪽으로 750㎞ 떨어진 중부 도시 아가데즈의 드론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 미군 주둔 규모는 1천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주둔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니제르 군사정부는 지난 3월 모든 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군사정부 대변인 아마두 압드라만은 미국이 니제르가 선택한 동맹에 대해 반대를 제기했다고 비난했다. 지난해 7월 니제르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뒤 군사정부는 프랑스군 철군을 명령하고 러시아와 밀착해왔다. 미국이 니제르와 러시아의 밀착을 반대하자, 니제르 군사정부가 미군 철수를 명령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사태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확산을 막는 버팀목이라고 보는 미군의 철수가 야기할 힘의 공백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적성국인 러시아가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랭리 미 아프리카사령부 사령관은 미국은 니제르나 차드 등 최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와 간절히 관여를 유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정권 국가들과 대화를 유지해 그들을 “민주주의로 복귀하는 로드맵”에 올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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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정권 용인하던 미국 ‘인과응보’

사헬 지역에서 미국 등 서방이 밀려나고 러시아가 진출하는 상황은 2020년 말리를 시작으로 한 이 지역의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잇따른 군부 쿠데타로 야기됐다. 2020년 8월과 2021년 5월에 말리, 2021년 9월에 기니, 10월에는 수단, 2022년 1월과 9월에 부르키나파소, 2023년 7월에 니제르에서 쿠데타가 연이었다. 쿠데타의 파고는 프랑스 등 서방과 얽힌 이 지역 국가 문민 엘리트 통치의 독재와 부패로 상징되는 프랑스 식민주의 잔재에 대테러전의 혼란까지 겹치면서 발생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부 아프리카의 9개 나라 중 7개국이 과거 프랑스 통화인 프랑과 가치가 연동됐던 세파프랑(CFA프랑)을 지금도 사용하고, 지역 엘리트들은 프랑스와 이권이 얽혀 있다. 이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는 프랑스 세력권인 ‘프랑사프리카’라고도 불린다. 니제르에서는 쿠데타 발생 전부터 ‘엠(M)62’ 등 시민단체들이 반프랑스 시위를 벌이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말리와 니제르 등에서는 쿠데타 뒤 프랑스 세력 축출을 주장하고 러시아 국기를 흔드는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 등 서방은 이 지역 국가들의 쿠데타가 문민통치와 민주주의를 전복한다고 주장하지만, 위선적인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등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문민정부들이 권력을 유지·연장하려는 “헌법 쿠데타”를 서슴지 않았지만, 모른 척했다. 2019년 토고에서 포르 냐싱베 대통령이 임기를 두 차례 더 연장하는 개헌을 했고, 2020년 기니에서도 대통령 임기 연장을 위한 헌법 및 관련법 개악이 이뤄졌다. 베냉에서는 2021년에 야당들이 의회 선거에서 배제됐고, 야당 지도자 2명이 선거 전에 구금되고 장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니제르에서 쿠데타 발생 뒤 서방이 지원하는 서아프리카 15개국 모임인 ‘서아프리카국가경제공동체’(ECOWAS)는 니제르 군부가 헌정 질서를 복구하지 않으면 무력 개입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니제르 군부는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바그너 그룹 용병을 불러들이는 등 러시아와 밀착하는 역풍이 일었다. 서아프리카공동체의 위협에 군사정부가 들어선 말리·부르키나파소·니제르는 지난해 9월16일 동맹을 결성해, 반서방 행보에 나섰다.

미국은 서아프리카 사헬에서 러시아의 진출에 방역선을 치는 등 주변 단속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23일 동아프리카의 중심 국가 케냐의 윌리엄 루토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케냐를 블랙아프리카 국가로는 처음으로 ‘주요 비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했다.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가 미국을 국빈방문한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다. 루토는 2007년 대선에서 폭력 사태로 인도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한 인물인데도, 미국을 국빈으로 방문한 것이다. 미국의 다급한 처지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가자 전쟁은 곳곳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와 중·러가 의도하는 다극화 질서의 충돌과 대결을 확산시키는 ‘그레이트 게임’을 목격하게 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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