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금속이 조형미까지 갖춘 작품으로 [ESC]
신라·고려 시대 기술의 계승
은·주석·황동·스테인리스 활용
품격 있는 접시·쟁반·가구 등 변주
신라동·고려동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얼마 전 대학원에서 과제로 읽어야 했던 논문에서 처음 보았는데 신라와 고려 시대에 사용했던 동전을 의미하는 것인가 싶었다. 신라동과 고려동은 각각 신라와 고려 사람들이 만들어 수출했던 금속이다. 한반도에서는 질 좋은 동(銅)이 산출되었고 신라와 고려는 이를 제련하고 합금하는 기술이 뛰어나 품질 좋은 동과 동제 공예품을 중국과 일본으로 꾸준히 수출하면서 브랜드화한 것이다. 우리 땅에 살던 사람들은 금속을 잘 다뤘고 기원전 1000년부터 청동기를 사용하며 시대마다 뛰어난 금속기를 사용해왔다고 한다. 백제금동대향로와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동제 그릇 등으로도 섬세하고 견고한 동합금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수출품이었던 신라동·고려동
신라의 금속기는 일본 왕실 유물을 보관해온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통일신라가 일본으로 수출했던 유기 유물 436점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유기 사발과 접시, 수저 등 신라에서 제작한 유기 유물은 1500년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당장 사용할 수 있을 듯이 오늘날 그릇과 유사하다. 숟가락은 신라에서 종이로 포장해 보낸 형태 그대로 보관돼 있어 호기심을 더한다.
고려 시대에도 고려동이라는 브랜드로 북송과 요나라 등으로 수출하며 신라동의 위세를 이어갔다. 고려는 일상생활에서 동으로 만든 공예품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북송에서 고려에 온 사신 서긍이 11세기 고려 사회의 모습을 상세히 적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평상 위에 작은 소반을 놓고 구리그릇을 사용해 말린 고기와 생선, 채소를 섞어 내놓지만 풍성하지 않다”고 기록해 동기를 그릇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그릇을 비롯해 대야·집게·향로·종 등의 다채로운 동제 유물이 확인된다. 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도 고려의 작품이니 조상들의 금속 기술은 단단한 자부심으로 녹슬지 않은 채 현재의 예술로 이어지고 있다.
옛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했던 금속공예품은 이제 유물이 되었고, 현재 우리의 일상에는 스테인리스 수저와 냄비 등은 쓸모는 있으나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이었다. 돌이켜보면 쓰임새 있고 조형미까지 갖춘 금속공예품을 곳곳에서 만났고, 고된 작업을 수행자처럼 해내고 있는 금속공예 작가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포 작가(활동명)는 작업실이 있는 서울 북한산을 매일 산책하며 자연의 형태와 심성이 깃든 금속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업실 이름인 ‘스튜디오 포’는 현재를 전통으로 감싼다는 의미(감쌀 포, 包)’를 담았다. 숲길에서 채집한 연약한 자연물을 은과 주석, 황동 등의 금속으로 단단한 생명을 부여해 오래도록 곁에 머물 수 있게 했다. 작은 잎이 나풀거리는 나뭇가지는 과일꽂으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가냘픈 낙엽이 작은 접시로, 장수벌레가 문진(붓으로 글씨를 쓸 때 종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누르는 도구)으로 변신해 어린 시절 숲에서 소꿉놀이하듯 따스한 감정을 되살린다.
지난 4월 경기도 여주 작업실에서 만났던 박미경 작가의 묵묵한 두드림도 묵직한 울림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동과 구리, 은 등을 두드려 모양을 잡고 옻칠로 깊은 색을 입히느라 작업실에는 수많은 도구가 가지런히 정렬해있고 특유의 옻향이 가득 배어 있었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완성된 공예품도 멋지지만, 작업실에서 다듬어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는 작품에서 오히려 작가의 고뇌와 치열함이 더 잘 보인다. 단단한 금속을 달래고 옻칠로 겹을 쌓는 고요한 반복이 깃든 공간에서 만난 작품들은 더 찬란하고 다정해 보였다. 차를 마실 때 다관(차를 우려내는 주전자)을 올려두는 차판에선 가늘게 뚫은 동판에 꽃을 새겼고, 오로라 같은 황홀한 푸른색을 옻칠로 그린 식탁매트는 밥상 위를 갤러리로 만들어버릴 듯하다. 사심을 품게 한 작품은 동으로 만든 타원형 트레이였다. 넉넉한 크기 덕분에 와인을 여러 병 넣을 수 있는 바구니로 활용하기 좋고 뒤집으면 작은 테이블이 되어 야외에서 작은 찻상으로 쓰기에도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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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물성에서 느껴지는 온기
김현성 작가의 금속작업도 다채롭게 전개되어 금속공예의 아름다운 확장성을 늘 확인시켜준다. 작은 커틀러리(포크 등 서양식 식사 기구)부터 가구와 조명까지 특유의 기하학적 조형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최근 서울 한남동 라니서울 갤러리에서 만난 비정형의 평평한 접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은 핑거푸드를 담아 유쾌한 파티 분위기를 연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황동으로 모양을 잡고 주석으로 도금해 은빛을 더했고 붓 터치를 살린 표면에서 무심한 듯 말을 거는 작가의 손길을 더했다.
황형신 작가의 금속 가구는 차가운 물성이 분명한 스틸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한다. 수없이 반복한 연마 과정을 통해 따스한 표면을 만들어낸 것일 텐데 손으로 어루만져보면 무결하고 순수하게 치열했을 과정과 마음이 전해진다. 황 작가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재개발 현장의 콘크리트와 벽돌의 쌓임에서 영감을 받아 스테인리스 스틸로 ‘쌓기’라는 조형 실험을 하는 ‘레이어드 시리즈’ 가구를 선보이고 있다. 작은 건축물을 짓듯 완성한 스틸 가구는 안정감을 주는 기하학적 비례로 차분하고 듬직하다. 마침 부산 초량동의 복합문화공간 ‘오초량’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오는 7월7일까지 열린다. 책상과 병풍, 콘솔, 의자, 라운지 테이블 등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이른 여름 휴가로 부산을 다녀올 요량이다. 일맥문화재단의 전시관인 일본식 근대 가옥 공간에서 ‘갤러리 클립’을 운영하는 정성갑 대표의 안목으로 공예품과 가구, 그림까지 채운 ‘에디터갑의 집’이라는 전시도 같은 공간에서 열린다. 역사가 담긴 공간에서 기품 있는 꾸밈과 향긋한 차까지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니 한 번 방문하는 걸로는 분명 성에 차지 않을 듯싶다.
글·사진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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