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타이완 최전방 공격에서 비롯된 '뜻밖의 히트상품' [스프]
1949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北京) 시 톈안먼(天安門) 위에서 사회주의정권 수립을 선언하였다. 3주 뒤 푸젠(福建) 성 샤먼(廈門)에서 화동야전군 10병단이 상륙 작전을 준비하였다.
대만으로 건너간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10병단 사령관 예페이(葉飛)는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저 앞에 보이는 진먼다오(金門島)는 그냥 섬이 아니라 대륙과 대만을 연결해 주는 통로다"라며 작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당시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샤먼까지 밀고 내려와 사기가 높았다.
게다가 진먼다오에는 국민당군 패잔병이 지키고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진먼다오에는 대만인으로 구성된 2만 명의 국민당군이 있었다. 또한 대륙에서 넘어온 18군도 합류했다.
이들을 이끈 후롄(胡璉) 사령관은 중일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명장이었다. 10월 24일 사위가 어두워지자, 10병단 병사들은 목선 수천 척을 타고 샤먼을 출발했다.
상륙부대가 구닝터우(古寧頭) 해변에 도착할 즈음 샤먼에서 포격으로 지원했다. 병사들은 기세등등하게 배에서 내렸으나 지뢰와 포탄,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상륙 작전은 3일 뒤 3,000여 명의 전사자와 7,000여 명의 포로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첫 진공은 실패했으나 중국군은 진먼다오 점령을 포기하질 않았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자, 중국군은 육·해·공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출정을 주저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첨단 병기의 쓴맛을 봤던 터라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다.
마오는 1958년 8월 23일 진먼다오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이날 샤먼의 포병부대는 459문의 대포를 동원했다. 또한 80여 척의 군함과 200여 대의 전투기가 출동했다.
갑작스런 중국군의 공격으로 진먼다오는 순식간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만에 부사령관 3명과 수백 명의 대만군 병사가 숨졌다. 수일간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양국 함정이 바다에서 치열한 해전을 펼쳤다. 양국 전투기는 하늘에서 공중전을 벌였다. 이에 미국은 항공모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등을 대만에 출동시켰다. 일본에 주둔했던 해병대 3,800명도 수송기를 나눠 타고 대만에 내렸다.
하지만 전황은 이해 못 할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중국군은 진먼으로 진입하는 대만 함선과 비행기만 공격했다.
마오쩌둥은 중국군 장군들에게 미군 군함에게 포격을 받더라도 절대 반격을 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미군 선단도 진먼다오에 진입하는 흉내만 냈을 뿐 선수를 곧 대만으로 돌렸다.
한 달이 지나자 진먼다오는 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나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진먼다오에 상륙할 기미가 없었다.
사실 마오는 애초 전면전을 치를 의사가 없었다. 7월 이라크에서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심왕조가 타도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혁명이 중동 전체로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 6함대를 파견했다.
중국은 6함대의 화력을 분산시켜 중동의 혁명세력을 간접 지원하고자 했다. 이에 진먼다오를 공격했던 것이다. 미국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1957년에는 소련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만약 중국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소련과 핵전쟁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이에 미군 함선은 대만해협을 떠돌면서 군사 시위만 벌였다. 10월 13일 중국은 돌연 포격의 중지를 선언했다. 평화회담을 제의하면서 미국과 대만 사이를 이간질했다.
10월 말에는 진먼다오로 들어가는 대만 함정의 진입을 용인했다. 그 뒤 양국의 군대는 짝수 및 홀수 날에 번갈아 가며 포탄을 쏘았다. 이듬해부터는 상대방이 아닌 바다에 쏘아댔다.
하지만 전쟁이 진먼다오에 끼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과 민간인 618명이 죽었고 2,600여 명이 다쳤다. 전체 군도에 떨어진 포탄은 47만 발이었다.
진먼 포격전은 1979년 1월 중국과 미국이 외교 관계를 맺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대만은 진먼다오를 요새화했다. 1958년부터 12개, 연장 10여km에 달하는 지하 갱도를 건설하였다.
지하 갱도는 각종 군사시설, 주민 4만여 명이 생활할 수 있는 거주 공간 등 엄청난 대역사로, 1992년에야 완공되었다.
대표적인 자이산(翟山) 갱도의 경우, 바다에서 섬 안으로 연결될 수 있는 수로와 지하 도로로 구성되어 있다. 수로는 A자로 높이 8m, 폭 11.5m, 길이 357m에 달한다. 도로는 높이 3.5m, 폭 6~7m이다.
수로는 상륙용 주정(LST) 42척이 한꺼번에 머물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도로는 탱크가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갱도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담수로 만드는 시설을 만들어 게릴라전까지 준비하였다.
이 같은 전쟁터 체험을 위해 오늘날 진먼다오를 찾는 관광객 중 적지 않은 수가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진먼·마쭈(馬祖)와 푸젠 간에 소삼통(小三通)이 허용된 2001년부터 방문했다.
그 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본래 진먼다오는 대만인들도 쉽게 방문하지 못했다. 1987년 대만에서 계엄이 해제되었지만, 진먼다오는 1992년까지 계엄 통치가 계속되었다.
이때까지 주민들은 어로 활동을 못했고, 밤 10시 이후 통행과 점등이 금지됐다. 하지만 계엄 기간 진먼다오 주민들을 먹여 살린 구세주는 10만 명의 군인이었다.
대만은 군인들에게 진먼다오에서만 쓸 수 있는 지폐로 월급을 지급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은 진먼다오에서 먹고 쓰고 놀았다.
1937년에 설립된 칼 제조공장 진허리(金合利)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 군대 내 부엌칼과 대검 수요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정둥(吳增棟) 사장은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섬 곳곳에 박힌 수십만 발의 포탄 중 일부를 수거해서 다양한 포탄 칼(砲彈鋼刀)을 만들었다. 또 다른 특산물인 '진먼고량주(高粱酒)'도 탄생했다. 진먼고량주는 진먼 술공장(酒廠)이 생산하는 전통 증류주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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