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세균전 불만 가진 전문가, CIA에 '처형'됐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2024. 6. 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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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1]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⑳

에롤 모리스 : 대체 프랭크 올슨이 무슨 일을 했기에 정부가 나서서 죽인 걸까요?

시모어 허시 : 알고는 있지만 말씀은 못 드려요. 답답할 노릇이라고요? 저라고 이렇게 인터뷰에 나와서 신비주의로 일관하고 싶은 줄 아세요? (조금 뜸을 들인 뒤) 프랭크 올슨은 반체제인물(dissident)로 찍혔어요. 1953년의 정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땐 러시아와의 냉전에 해가 되는 인물이라 판단되면 가차 없이 제거됐어요.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CIA에서) 해고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요. (미국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아는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뻔하잖아요. 프랭크 올슨은 (살해) 표적이 된 거에요. 그는 자신이 (미국이 하는 일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다른 가치를 믿는다는 걸 내보였잖아요(He was marching to a different drummer). 그래서 위험인물이 된 거고요. 거기까지입니다. 더는 말씀 못 드려요.

위에 옮긴 대화는 미 다큐 감독 에롤 모리스가 만든 <웜우드>(Wormwood)에서 옮긴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2017년에 출시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은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이다. 에롤 모리스(1948-)는 명작 다큐로 이름이 잘 알려진 감독이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무렵에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1916-2009)를 주인공으로 한 <포그 오브 워>(The Fog Of War, 2003), 텍사스 경찰을 죽였다고 누명을 쓴 사건을 소재로 삼아 미 사법체계의 문제점을 들춰낸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 등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

시모어 허시(1935-)는 탐사보도 분야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전문기자다. 베트남전쟁에서의 미라이 학살(1968), CIA의 칠레 쿠데타 개입(1973),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 위기와 사임을 몰고온 워터게이트 사건(1974) 보도로 퓰리처상을 비롯, 언론계에서 주는 상들을 휩쓸다시피 했다. 나이 80을 넘겨 90에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엄청난 글을 써왔다. 소련과 우크라이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무렵인 2022년 9월 미 해군 특수부대가 러시아-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을 폭파했다는 기사(2023년 2월8일)도 큰 눈길을 끌었다(물론 미 정부는 그런 사실을 부인했다).

<웜우드> 다큐의 핵심 내용은 이러하다. △미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미 생화학무기 연구·개발기지)에서 일하던 세균학자(박사) 프랭크 올슨(Frank Olson, 1910-1953)은 다름 아닌 CIA 요원이었고 △미국의 한반도 세균무기 사용과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모의실험, LSD 약물과 고문을 이용한 CIA의 잔혹한 인간 심문 방식 등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1953년 맨해튼 고층호텔에서 떨어져 숨진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 그것도 미 정보기관인 CIA가 '처형'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맨해튼 고층 호텔의 추락사

뉴욕 맨해튼의 한인타운 가까운 곳에 펜실베이니아 기차역이 있다. 뉴요커들이 흔히 '펜 역'(Penn Station)이라 부르는 이 기차역은 워싱턴, 보스턴,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 미국의 대도시들을 기차로 잇는 교통의 심장부다. 기차역 바로 건너편에 (도심 재개발로 2023년에 철거되기 전까지) 22층 높이의 고층 호텔이 하나 있었다. 2200개의 객실을 가진 큰 호텔로 1950년대의 옛 이름은 스태틀러, 철거 직전엔 펜실베이니아 호텔로 불렸다. 1953년 11월28일 새벽 2시30분쯤, 스태틀러 호텔의 야간 근무자는 어떤 사람이 호텔 창문으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호텔 앞 보도에는 한 중년 남성이 속옷과 반바지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등을 펴고 누워 있었지만 다리는 끔찍하게 꺾인 모습이었다. 그래도 숨이 붙어 있었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구급차가 왔을 무렵,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야간 근무자가 위를 쳐다보니 11층 높이의 호텔방 창문이 깨지고 블라인드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과 함께 야간 근무자가 문제의 방(1018A호실)으로 올라가보니, 한 남자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데트릭 기지에 근무하는 화학자 로버트 래쉬브룩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보니, 동료 과학자인 프랭크 올슨이 창밖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래시부룩은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라 다른 사람을 들어 올려 창밖으로 내던질만한 힘은 전혀 없어 보였다. 호텔 교환원은 사건 바로 뒤에 1018A호실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와 짧게 통화하면서 "그가 가버렸다"(He's gone)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래시브룩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우겼다.

▲ 미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과 1953년 그가 ‘투신 자살’했던 곳으로 발표된 뉴욕 맨해튼의 스태틀러 호텔.

'자살'로 위장한 '처형'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둘이다. 첫째는 미 데트릭 기지 안에 있던 미 육군 생물전연구소(USBWL)에서 일했던 프랭크 올슨이고, 둘째는 미 정보기관인 CIA다. 올슨은 희생자이고, CIA는 가해자다. 스태틀러 호텔 11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올슨은 처음엔 '자살'로 발표됐다. 유가족은 가장의 느닷없는 죽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맏아들 에릭(사건 당시 8살)은 아버지의 죽음은 '타살'이라 의심했다. 하버드대 심리학박사 출신인 에릭은 부친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려고 오랜 노력을 기울였다.

에릭이 보기에, 그 죽음은 범죄자가 시민을 죽이는 따위의 '타살'이 아니었다. 비밀을 많이 아는 자의 입을 막으려는 국가기관의 '처형'이었다. 탐사전문기자 시모어 허시는 (자신의 고급 정보원인 '내부자'가 알려준 사실을 근거로) 올슨이 CIA의 결정에 따라 '제거'됐다고 아들에게 뒤늦게 확인해 주었다. CIA 보안과(Security Resaerch Staff)에서 고용한 전문 킬러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올슨이 죽었을 때 CIA 국장은 앨런 덜레스(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존 덜레스의 동생, 국장 재임 1953-1961)였다. 올슨은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죽었을까. 아들은 두 가지를 꼽는다. △미국이 6.25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펼쳤고 △스파이 용의자들의 입을 열려고 LSD를 비롯해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을 사용하고 고문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등 CIA의 가혹행위와 관련된 비밀이다. 올슨은 미 국가기관이 저지르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올슨은 그런 비밀들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가족들은 올슨이 미 육군의 생화학부대인 데트릭 기지의 핵심 요원으로 춭퇴근을 했던 민간인 과학자로 알고 있었다. 이는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보다 정확한 올슨의 신분은 CIA 소속이었다. 세균학자인 올슨은 그의 업무상 한반도 세균전과 CIA 고문 사실을 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가족들조차 올슨이 CIA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죽은 지 20여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알아챘다(1978년 윌리엄 콜비 CIA 국장은 회고록을 내면서 그 속에서 "올슨은 CIA 요원이었다"고 처음 밝혔다).

'데트릭 안의 데트릭' 핵심 요원

여기서 올슨의 출신 배경을 짧게 살펴보자. 1910년 위스콘신 주의 한 작은 광산촌에서 스웨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올슨은 1938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땄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그는 퍼듀 대학교의 농업실험기지에서 작물의 세균을 연구하던 과학도였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1941)으로 미국이 전쟁 국면으로 들어가자 현역으로 소집됐고, 전공을 살려 미 육군화학단에서 장교(최종 계급은 대위)로 복무했다.

올슨의 운명을 바꾼 것은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던 아이라 볼드윈의 전화 한 통이었다. 볼드윈은 올슨에게 곧 창설된 데트릭 세균기지에 연구원으로 합류하길 권했다. 1943년 출범한 데트릭 기지는 731부대를 중심으로 일본이 중국에서 생화학전을 펴는 것을 보면서, '미국도 세균전으로 손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미국의 생화학 전력을 키우기 위해 만든 본거지였다(연재 66 참조).

올슨이 근무하던 미 육군 화학단은 새로 문을 연 데트릭 기지를 운영하는 주체가 됐고, 자연스럽게 올슨은 데트릭 창립 요원이 됐다. 1944년 군복을 벗은 올슨은 민간 계약자로 남아 그곳에서 세균무기 연구·개발을 이어갔다. 그가 어느 시점에서 CIA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를 모체로 1947년에 만들어졌다. 올슨이 CIA에 세균전문가로 고용된 것은 그 무렵으로 보인다. 동서 냉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CIA는 데트릭 기지의 세균부대 연구원들과 업무상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CIA가 출범하던 1947년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냉전 대결구도가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언젠가 벌어질지 모를 소련과의 전쟁에서 세균무기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미국도 세균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49년 봄 데트릭 기지 안에 특수작전부서(Special Operations Division, SOD)가 꾸려졌다. SOD는 극도의 보안을 요구했기에 '테트릭 안의 데트릭'으로 일컬어졌다. 1950년 올슨은 SOD의 '책임자 대행'(acting chief) 자리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올슨은 핵심 요원으로 인정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어 허시(왼쪽)와 죽은 세균학자의 아들로 하버드대 심리학박사 출신인 에릭 올슨(오른쪽).

샌프란시스코에 뿌려진 세균 분무

데트릭 기지에서 올슨이 주로 했던 연구는 대기 중에 독성 물질을 분무기(스프레이)로 뿌려 그 성능을 실험하는 것이었다. 이런 실험이 공개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비밀 실험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생겨나고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1950년 이른바 '바다-스프레이 작전'(Operation Sea-Spray)로 알려진 세균 실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작전은 한국전쟁이 터진지 3개월째인 1950년 9월20일과 27일, 샌프란시스코 연안에서 이뤄졌다. 미 해군 함정은 모두 6회에 걸쳐 세라티아(serratia)와 바실러스(bacillus) 세균을 분무 형태로 뿌렸다. 거대한 호스로 뿌리는 세균 분무는 해변에 깔린 짙은 안개 속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데트릭 기지 연구원들은 그 세균들이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8개 도시 중심부에 이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지를 기록했다.

문제는 모의실험 과정에서 세균에 취약한 노약자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균을 뿌린 일주일 뒤, 11명의 환자가 심각한 요로 감염으로 샌프란시스코 스탠포드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이 가운데 75살 난 환자 1명이 죽었다(훗날 유가족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다). 의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허둥댔고 나중에 그 사실을 의학지에 실었다. 2015년 6월 미 잡지 <디스커버>(Discover)에 실린 그 때의 기록을 보자.

[스탠포드 대학병원 의사들은 특이하고 예상치 못한 발견을 했다. 세라티아 세균 감염은 매우 드물어서 철저한 역학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특이한 유기체의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 스탠포드 의료진은 보고서에서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임상 관찰로서 인간의 소변에서 붉은 색소를 생성하는 박테리아를 분리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중에 두 명의 환자에게 균혈증이 생겼고, 한 명의 환자는 반복적인 요로 감염과 심장 감염의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미생물학 역사상 세라티아의 첫 번째 발병으로 기록되었다.](Rebecca Kreston, Blood & Fog: The Military's Germ Warfare Tests in San Francisco, https://www.discovermagazine.com/health/blood-and-fog-the-militarys-germ-warfare-tests-in-san-francisco)

여기서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1947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의사들을 단죄하면서 만들어졌던 '뉘른베르크 강령'(The Nuremberg Code)은 △불필요한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해를 피해야 하고 △사망 또는 장애를 일으키는 부상이 생길 우려가 있는 실험은 하지 말아야 하며 △상해와 장애 또는 죽음으로부터 피실험자를 지킬 수 있도록 적절한 준비와 설비가 마련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연재 65 참조).

샌프란시스코 연안에서의 세균 살포가 비록 모의실험이긴 했지만, '뉘른베르크 강령'에 견주어 보면 미국 시민들 몰래 실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이었다. 올슨이 참여했던 세균 모의실험이 있었을 무렵만 해도 나치 의사들을 처벌했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다. 올슨은 세균학박사로 나름의 지적인 교육을 받은 연구자였다. 다른 국가도 아닌, 부도덕한 실험으로 생사람을 희생시켰던 나치 의사들을 처벌했던 국가(미국)가 버젓이 그런 비밀 세균실험이 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업무상 알게 된 추악한 비밀들

올슨은 1952년 5월 문제의 CIA 심문 프로그램인 아티초크 프로젝트(Project Artichoke)에 관계하게 됐다.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와 같은 약물, 최면과 더불어 필요할 경우 고문을 해서라도 스파이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려는 실험적인 심문 기법이었다. 말이 '실험'이지 약물·최면·고문을 결합한 심문을 받는 용의자의 결말은 대부분이 초죽음 상태였고 때로는 죽기도 했다. 1953년 CIA 안에서는 심리 통제(mind control)로 용의자를 세뇌시킨다는 이 기법을 '엠케이울트라 프로젝트'(Project MKUltra)란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인간 정신을 약물로 파괴하려는 불법행위라는 본질에선 똑 같다.

올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이 또 있었다. 유럽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그곳 CIA 안전가옥에서 끔찍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됐다. 소련 스파이로 의심 받은 용의자들이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끝내 숨을 거두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이었다. 그러면서 "이건 아니지 않는가"하는 직업적인 회의를 강하게 느꼈고, 사표를 내고 떠날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올슨이 데트릭 기지를 그만 두려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직업적 스트레스였다. 당시 올슨과 그의 동료 연구자들은 세균무기와 아울러 보툴리누스 세균과 탄저균을 요인 암살용으로 연구 개발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1960년 아프리카의 반미 성향 지도자였던 패트리스 루뭄바 콩고 총리를 암살하려고 보툴리누스 세균을 아프리카로 실어 보냈다. 그러나 CIA 요원들은 삼엄한 보안을 뚫는 데 실패했다. 미국에겐 다행히도, 루뭄바가 쿠데타 군에게 살해되자, 그 암살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주디스 밀러 외, 주디스 밀러 외, <세균전쟁: 생물학 무기와 미국의 극비전쟁>, 황금가지, 2002, 89쪽 참조).

올슨이 특히 노력을 기울인 것은 탄저균을 은밀하게 퍼트리는 에어로졸 개발이었다. 그 과정에서 데트릭 기지 안에서 실험 재료로 썼던 동물들이 병원균이나 가스에 중독돼 처참하게 죽는 모습들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침에 데트릭 기지로 출근한 뒤 실험실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원숭이들을 볼 때마다 올슨은 우울해졌다.

올슨의 집은 기지 철조망 바깥에 바로 맞닿아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 아내 앨리스는 남편 올슨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금세 알아챘다.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원숭이들이 죽을 때마다 올슨은 입을 굳게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기 얼마 전부터 그는 아내에게 데트릭을 떠날 뜻을 비쳤다고 한다.

▲ 미 정보기관 CIA의 심문기법을 다룬 MKUltra 관련 문서. 1953년 6월9일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피의자 심문 때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를 활용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CIA

"한반도에 세균전 펼치는 데 격분"

올슨이 사표를 내려 했던 요인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세균전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비록 소규모이긴 했지만) 세균무기로 성능을 실험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데트릭 기지에서 미 CIA 직원으로 일한 세균전문가 올슨이 모를 리 없었다. 올슨은 직급상이나 업무상으로도 그런 사실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 <웜우드>(Wormwood)를 보면, 올슨의 아들 에릭은 2001년 그가 어릴 때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데트릭 기지의 동료 연구원 노먼 케노이어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노먼이 에릭에게 전화로 해준 말은 인상적이다. "에릭,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린 게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해야 해."

그 말을 듣고 에릭은 아버지의 옛절친 집으로 찾아갔다. 노먼은 전부터 에릭이 짐작해왔던 예민한 대목을 들려주었다. "네 아버지는 미국이 한국에 세균무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해 격분했어." 그 말을 들은 아들 에릭은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사실을 못 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CIA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끝내 제거 대상에 올랐음을 확신하게 됐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요인들이 겹쳐 1953년 말 무렵 올슨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급기야 올슨은 '직업적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악화'를 이유로 상사인 빈센트 루웨트 중령에게 사직할 뜻을 밝혔다. 올슨은 그 무렵 동료들에게도 "내가 그냥 사라지게 해달라"(just let me disappear)는 말을 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루웨트 중령은 "사표를 내려하지 말라"고 말렸다. 올슨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로 뒤 올슨을 동료 연구원 래시브룩과 함께 뉴욕으로 떠나보냈다. 명분은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이었지만,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지난 주 글에서, 데트릭 기지의 세균연구자 시어도어 로즈버리(워싱턴대 명예교수, 세균학)에 대해 살펴봤다. 그는 사표를 내자마자 <평화인가 페스트인가>(Peace or Pestilence)란 책을 내면서 "미국은 세균무기를 개발하지 말고 방역을 연구하라"고 비판해 미국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CIA는 올슨이 로즈버리처럼 자유의 몸이 된 상태에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과 CIA의 잔혹한 심문을 비롯한 극비사항을 폭로하는 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을 것이다. CIA의 시각에서 올슨을 로즈버리에 견주면, 올슨은 더 많은 고급정보를 지녔기에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 결과는 '물리적 제거', 곧 비밀 처형이었다.

제거 대상에 오른 '위험인물'

캐나다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역사학자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중부유럽대학CEU 총장)은 올슨의 맏아들 에릭과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다. 1970년대 중반 이그나티에프는 역사학 박사과정을, 에릭은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그나티에프는 <뉴욕타임스>에 '누가 프랭크 올슨은 죽였는가'란 제목을 단 기고문에서 CIA가 올슨을 '위험 인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제보가 있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프랭크 올슨의 여권에 있는 출입국 도장은 그가 1953년 여름에 스웨덴, 독일, 영국에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 언론인 고든 토마스를 통해 (올슨의 큰 아들) 에릭은 그의 아버지가 런던에서 (용의자) 세뇌 기술에 대해 영국 정보부에 조언을 해왔던 정신과의사 윌리엄 서건트를 만났고, 그에게 CIA의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건트의 평생 친구였던 토마스에 따르면, 올슨은 서건트에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영·미 공동 비밀 시설들에서 끔찍한 약물실험과 고문이 저질러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서건트는 올슨의 말을 들은 뒤 그가 보안을 위태롭게 한다고 영국 정보기관에 알렸다. 그러면서 (영국 윌트셔에 있는 과학 및 국방기술연구소, 사실상의 생화학무기 관련 연구소인) 포톤 다운(Porton Down)에 올슨의 접근을 막으라고 권고했다.](Michael Ignatieff, Who killed Frank Olson? <뉴욕타임스> 2001년 4월1일)

위의 글로 미뤄보면, 미 CIA는 올슨이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큰 위험인물'이라는 영국 정보부의 판단을 전해 받았고, 그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검토했을 것이다. 상사인 빈센트 루웨트 중령에게 사직할 뜻을 비추자, 제거 작전이 빠르게 실행에 옯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바로 며칠 뒤 올슨은 뉴욕 맨해튼 스태틀러 호텔에서 한밤중에 추락사했다. 그의 유가족에게는 올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통보됐다.

유가족들은 올슨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1975년 CIA는 누가 들어도 그럴듯한 설명으로 또 다시 사람들의 눈을 흐렸다. '자살'이긴 했지만 CIA 요원이 올슨 몰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를 술잔에 넣어 그 부작용으로 뛰어내려 죽었기에, 국가가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거액의 배상금을 건넸다. 이 글 맨 앞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어 허시도 그때 속아 넘어갔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은 이어졌다. 결국 1994년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법의학자들이 부검을 했다. 다음 주에 CIA의 올슨 '처형'에 얽힌 이야기들의 결말을 보자.(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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