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현으로 삶에 또다른 시공간 열려”…해금에 빠진 사람들 [ESC]

한겨레 2024. 6. 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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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활과 현이 만나 봉인된 소리 여는 ‘해금’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인 올레나 시도르추크가 해금 연주하는 자세를 보였다. 윤은숙 제공

드라마·광고 음악으로 친숙…코로나 때 ‘고립감 해소’ 동호인 늘어
국악기 중 가장 넓은 음역대, 연습 어렵지만 “꾸준히 하면 예쁜 소리”
‘한국의 정서’ 상징하는 악기…“어떻게 그런 소리가?” 외국에서도 관심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청산별곡’ 중)

천년의 시간을 넘어 해금이 왔다. 고려가요 ‘청산별곡’ 속에서 사슴이 켜던 신비한 현악기는 지난해 발매된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 슈가의 솔로 앨범에도 등장한다. 긴 역사를 뒤에 업은 전통악기지만, 해금의 소리는 ‘전승’에 안주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다양한 소리에 도전하고, 여러 악기들과 어울려 변화하고 있다. 이미 2000년대 들어 각종 영화·드라마를 통해 소리를 알린 뒤 이제 대중과 가장 가깝게 호흡하는 국악기로 자리 잡았다.

해금은 원통형으로 생긴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 사이에 줄을 연결해 만든다. 모양새는 단출하다. 다만 2개의 줄에서 나오는 소리는 숫자로 가두어 세기 힘들다. 일단 국악기 중 음역대가 가장 넓다. 우는 듯 웃는 듯 묘하고 다양한 소리를 낸다. 연주하는 이들은 가끔은 악기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서울 서초구 박주현 해금연구소에서 연주자가 해금을 연주하고 있다. 해금은 왼쪽 손가락으로 명주실로 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대를 좌우로 켜서 소리를 낸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제가 하면 왜 귀신 소리만 나죠?”

서울 서초구 박주현 해금연구소 내 해금 스튜디오에서 해금사랑방 동호회 회원들이 해금 강습을 받고 있다. 박주현 대표(맨 왼쪽)가 장구로 장단을 맞추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해금 전공 연주자이자 2010년 대학 졸업 뒤부터 꾸준히 해금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박주현 해금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박주현 대표는 “해금은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고 한다. 서글프고 구슬픈 울음의 소리를 내지만, 어떤 때는 경쾌하고 밝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에서는 ‘추노’나 ‘동이’와 같은 예전 드라마나 광고를 통해 점차 해금의 소리가 알려지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 점점 늘었다. 모든 것이 멈췄던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는 고립감을 벗어나고 싶으셨던 분들이 많이 개인교습을 찾았다. 해금은 입으로 부는 악기들과는 달리 마스크를 벗지 않고 배울 수 있었기에 더 많이 찾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독특한 소리를 가졌지만 몸체는 작아 휴대하기도 편하기에 최근 해금은 많은 이들에게 인기다. 네이버 해금 관련 대표 카페인 ‘해금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은 2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초보자의 입문은 만만치 않다. 오른손으로는 활대를 잡아 현을 켜고, 왼손은 두 줄을 한꺼번에 감아 잡고 쥐거나 떼면서 음높이를 조절한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현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다. 손가락이 줄을 누르는 위치와 줄을 당기는 정도에 따라 음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정확한 음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해금 초보자들 사이에서 “아니, 제가 하면 왜 계속 귀신 소리만 나죠?”라는 한탄이 잦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금을 처음 만났던 직장인 김영광(35)씨도 초보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가 국악시범학교 사업에 선정되면서 얼떨결에 만난 해금을 켜기란 녹록지 않았다. 어른용만 생산되는 해금을 어린이가 다루기란 쉽지 않았다. 손가락에 어김없이 굳은살이 박였다. 악기를 잘못 선택한 게 아니냐고 후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오랜 연습과 노력으로 얻어낸 예쁜 소리는 이후에도 해금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버팀목이 됐다. 성인이 되어서는 유튜브로 독학을 이어갔고 중국에 유학을 가서는 첼로·피아노를 연주하는 친구들과 함께 ‘피, 첼, 해’라는 아마추어 연주단까지 만들었다. 2019년부터 해금사랑방동호회에 합류하며 연주와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박주현 해금연구소에 전시돼 있는 해금들. 가격은 10만원대부터 수백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그는 “방과후 수업 때 배웠던 활 쓰는 법과 현 잡는 법이 몸에 익었던 거 같다. 해금이 작고 간단하게 생기다 보니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는 경우도 많은데, 정말 민감한 악기다. 같은 사람이 연주해도 그날 기분에 따라서 막 음이 조금 높게 나오기도 하고 좀 강하게 연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습하다 보면 상상하지 못했던 예쁜 소리를 내 손에서 만나는 순간들이 분명히 온다”고 말했다.

박주현 대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아무런 음악적 배경이 없는 초보자가 해금을 배울 경우, 대략 1년 정도는 지나야 입문자를 벗어나 합주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전혀 배우지 않는 악기이기에, 악보를 보는 법부터 자세를 잡는 법까지 모두 새로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음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피아노나 다른 악기를 다뤘던 사람이라면 배우는 게 훨씬 수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성 드러내는 연주…동호회 경험하길”

해금 스튜디오에서 해금사랑방 동호회 회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감인 심혜진(51)씨는 정년퇴직하는 2035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누군가에겐 막막할 수도 있는 시점이지만, 혜진씨에게는 오롯이 해금과 함께할 수는 제2의 인생이 열리는 해이기 때문이다. 혜진씨는 해금 애호가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유명한 창작곡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라는 곡에 매료돼 해금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3년 정도 개인교습을 받으면서 해금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아이를 낳고 정신없는 ‘직장맘’ 생활이 이어지면서 해금은 잠시 울림을 멈췄다. 휴지기는 꽤 오래갔지만, 혜진씨가 해금을 잊은 적은 없다. 아이들은 자랐고, 여유를 찾은 혜진씨의 손은 다시 활을 잡을 수 있게 됐다. 7년 전부터 동호회 활동과 함께 2개의 현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해금은 학교·집을 오가는 나의 삶 속에 또 다른 시공간을 만들어준 악기예요. 직장에서는 선생님, 집에서는 아이들의 엄마로 지내지만 해금과 함께할 때는 오롯이 나와 해금만 있었죠. 이렇게 나에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시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 안에서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겼어요. 악기 연주가 주는 특별한 힘이었어요. 요즘 반려악기라는 말도 많이 쓰던데, 해금이야말로 앞으로 제 남은 생을 계속 함께할 반려악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혜진씨가 웃으며 말했다.

혜진씨는 토요일에 ‘국악인’으로 산다. 연습할 때 힘들긴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동호회원들과 함께 연주를 하는 시간은 행복하다. 그는 “처음 시작할 때 워낙 기본기를 잡기 어렵기에 개인교습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며 “어느 정도 실력이 쌓였다면 동호회에 꼭 참석해보길 권한다. 같은 악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지칠 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고 했다.

주부인 박시내(52)씨에게도 해금은 둘도 없는 친구다. 연주하는 악기에 ‘시내랑 해금이랑’의 뒷글자만 따 ‘랑랑’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시내씨의 본명은 박형자이지만, 해금을 연주할 때는 시냇물처럼 유쾌하게 음악을 즐기라고 해금 스승이 지어준 이름을 사용한다. 2014년 학부모 아카데미를 통해 해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내씨는 조용하고 주변과 교류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해금을 만나고 달라졌다.

“해금을 함께 연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연주한해금의 소리는 내 마음을 표현해줍니다. 꼭 같은 노래라도 가수에 따라 음악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해금은 연주자의 개성이나 감성을 많이 드러내줘요.연주하는 사람의 기쁜 마음이 더 커지기도 하고, 슬픔은 사그라들기도 하죠. 살다 보면 쌓이는 스트레스를 친구 만나서 적당히 풀 수도 있지만 그게 힘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해금을 켜면 그 소리에 스트레스가 시내에 실려 흘러가는 것 같아요. 악기를 시작하면서 성격도 더 명랑해진 것 같습니다.” 최근 남도의 육자배기 음악에 푹 빠진 시내씨는 해금의 아름다움이 더 널리 퍼졌으면 한다. 그는 “남도의 소리에는 아련하면서도 깊은 감정이 들어가 있다. 이런 소리의 기쁨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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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음악가들의 ‘해금 영접’

해금 뮤지션 발굴 프로젝트인 ‘해금프로젝트 펀(FUN)’ 시즌2 모습. ‘해금공간’ 유튜브 갈무리

해금 악기를 제조하는 업체인 서울 서초구 해금연구소 ‘무궁’은 해금의 열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곳 중 하나다. 무궁의 강순탁 대표는 “매일매일 (해금의 인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10여년 전 악기 만드는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잘 안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있었는데, 이제는 ‘회사가 앞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는 있겠구나’ 하는 확신은 가질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국립국악원 소속의 김선구 해금 연주자는 최근 해금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했다. 2021년에 이어 올해 시즌2를 치러낸 해금 뮤지션 발굴 프로젝트(해금프로젝트 펀(FUN))가 그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기 해금이 다양한 장르와 만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정부 지원 없이 해금을 아끼는 이들 중심으로 민간에서 시작해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프로젝트 이후 해금에 대해 더 많이 쏟아지는 관심에 뿌듯함도 느꼈다는 그는 앞으로 해금이 국외로 뻗어 나가는 날을 꿈꾼다.

“외국에서도 해금을 좋아하는 이들이 정말 많아요. 독일 필하모닉 센터에서 공연할 때 독일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해금을 한번 만져보겠다고 30분을 바깥에서 기다리기도 했죠.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다는 거였어요. 외국의 악기 형태와 많이 다르고 소리 역시 흔치 않기에 관심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해금은 충분히 훌륭한 문화상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넓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서양 악기 소리와도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점은 해금의 또다른 강점이다.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인 올레나 시도르추크가 해금 연주하는 자세를 보였다. 윤은숙 제공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모델·방송인 일을 하고 있는 올레나 시도르추크(29) 역시 해금의 ‘한국적인 소리’가 언젠가는 세계인들에게 인정받을 날을 꿈꾼다. 올해로 한국살이 8년차에 접어드는 올레나가 해금을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외국인 연주 공연에서 튀르키예 출신의 해금 연주자인 탐 제브뎃(Tam Cevzet)의 연주를 들었다. 제브뎃은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해금을 전공하면서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외국인 해금 연주자다. 어린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전통 플루트를 배웠던 올레나는 독특한 모양의 악기가 내는 다양한 소리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올레나는 “한국에 오래 살면서 역사를 함께 공부했는데, 해금 소리 안에는 전쟁과 분단 등 한국이 지나온 시간·역사가 들어 있는 것 같다. 해금을 배우고 들으면서 이 악기가 한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해금은 ‘위로’의 악기다. 햇살 좋은 5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해금 이야기를 할 때는 활짝 웃었지만, 가끔 전쟁으로 힘든 조국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요즘도 가끔 집에서 해금을 연주하는 그는 “한국은 아픈 역사를 이겨나가고 있는데, 사실 지금 우크라이나의 상황도 너무 힘들어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해금 연주곡인 ‘비익연리’를 가장 좋아하는 올레나의 꿈은 ‘한국의 소리’인 해금을 외국에 더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케이팝으로 한국을 많이 알지만, 한국의 진정한 아름다운 소리는 해금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배웠던 우크라이나 전통악기와 해금의 협주를 외국에서 선보일 날이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윤은숙 라이프콘텐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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