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억? 숨겨봐, 다 찾아내지"…경찰관이 '각성'하면 벌어지는 일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13만건(2022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제 아내가 개발자인데요. 팀장님 실력은 준 개발자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집에도 회사에도 개발자가 있어요."
지난 29일 경기북부경찰청 범죄수익추적팀장 권우성 경위(42)를 가리키며 수사관 김민수 경위가 이같이 말했다. 김 경위는 "팀장님은 마우스 없어도 엑셀을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단축키를 전부 안다. 이렇게 연구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경찰은 처음 본다"며 "한번은 개발자 아내에게 한번 봐달라고 해줄 수 있냐며 카카오톡으로 코드를 보내기도 했다"고 했다.
권 경위는 2021년 2월 범죄수익추적팀 신설과 함께 부임했다. 이전에는 고양경찰서 경제팀에서 사이버범죄를 수사했다. 그가 경찰로 일한 15년 동안 경제 범죄 기술은 고도화되고 수법도 복잡해졌고 갈증을 느꼈다. 데이터를 더 전문적으로 다루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범죄수익추적팀에 오면서 '각성'했다. 배울 수만 있다면 대전이든 서울이든 종횡무진 움직였다. 대전 통계교육원에서 경찰 대상 엑셀 교육을 들었다. 공공기관 대부분 한셀을 쓰는데 엑셀을 배우며 신세계가 열렸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서 신촌 한 컴퓨터학원에 위탁교육을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는 신이 났다. 그곳에선 파이썬을 익혔다.
비전공자로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책과 유튜브 강의를 독파하며 문제를 풀어갔다. 금융기관 40여곳 데이터가 통일되지 않아 불편함을 느끼자 파이썬으로 표준화했다. 범죄에 쓰인 계좌 거래 내역이 길어지다 못해 한계치인 10만행을 넘기자 그에 맞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활용해 최적화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자본시장법,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붙잡힌 30대 총책 A씨 등 40명의 범죄수익 277억원 전액에 대해 기소 전 몰수·추징 보전을 신청해 법원 인용을 받아낸 것이다.
A씨 일당은 유튜브 채널 라이브 방송 등에서 고수익을 보장하는 투자전문가 행세를 했다. 200~300%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허위 선물 거래 사이트 가입을 유도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가짜로 제작한 홈트레이딩 시스템(HTS, Home Trading System)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했다.
해당 HTS 프로그램에서는 가상으로 매도·매수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피해자들이 투자한 돈은 피의자들의 대포통장으로 들어갔다. A씨 일당은 이런 수법으로 2021년 8월부터 2022년 11월까지 120명으로부터 약 277억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피해자들은 주로 투자 경험이 적은 고령자나 주부였다.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7억~9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봤다.
추적을 시작하면서 일당이 사용한 계좌 수백개가 드러났다. 대포통장이나 ATM기를 이용한 자금 세탁이 수도 없이 이뤄지다 보니 계좌 거래 내역이 끝도 없이 길어졌다. 엑셀에서 10만행을 넘길 정도로 데이터가 많아져 함수를 활용할 수 없게 됐다. 범죄수익 추적이라는 시간 싸움에서 수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권 경위의 실력은 이때 드러났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거래 내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상자산이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범죄자들도 자금을 세탁하는 방법을 바꾸는 상황에서 권 경위는 새로운 공부를 이어 나가고 있다. 그를 지켜보는 수사관 김 경위는 "주말에도 혼자 연구하고 프로그램 만들고 출근하면 직원들에게 테스트해달라며 보내주신다"고 했다.
권 경위는 "수사를 직접 하지는 않다 보니 사건의 주인공이라 보기는 어렵다. 엄청 고생하는 수사팀을 지원하는 역할"이라며 "그 지원 역할을 한번 집중해서 해보라고 판을 깔아주시니 저는 그게 정말 재밌다. 가상자산이나 계좌 수만개가 있어도 우리 방법으로 범죄수익을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고 말했다.
김미루 기자 miro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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