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나무가 모여…전통 지키는 숲이 되다 [ESC]
도로공사, 고속도로 건설 현장서
수목 가져와 조성…3899종 자생
대나무·무궁화·잡초 전시장까지
한옥식 창틀 등 사진 장소 인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조선 시대도 아니건만, 난데없는 광경에 눈길이 멈춘다. 전북 전주 한옥마을의 풍경이다. 상점에서 한복을 빌려 입은 여행객들은 전주의 또 다른 볼거리다. 한옥마을은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굳건한 위상에는 사연이 있다. 후백제 견훤이 마지막으로 세운 수도 전주. 한반도에서 지리학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전주는 일제강점기 때 고초를 겪는다. 조선통감부가 풍남문을 제외한 성곽 전체를 철거해 성 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도심 진출을 도모했다. 당시 성 밖에서는 천민들이 살았다. 행상 등을 하며 미약한 경제활동을 이어가던 일본인들은 이를 계기로 상권을 형성하고 부를 축적한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전주 사람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지어 항거했다. 현재 대략 700여채가 모여 있는 한옥마을의 탄생 서사다.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이 있는 경기전, 4년 전 복원된 전라감영, 한옥마을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오목대,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동성당 등 한옥마을에는 여행거리가 많다. 하지만 전주에는 한옥마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주 여행의 새 트렌드는 ‘자연’과 ‘예술’이다.
수목원의 여름 무궁화
이제 ‘반려식물’이라는 조어는 낯선 말이 아니다. 그만큼 나무와 풀, 꽃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이가 많다는 방증이다. 바람에 수줍게 흔들리는 꽃잎에, 쏟아지는 폭우에도 꺾이지 않는 나무에 자신을 투영하며 위로받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식물 치유’가 화두인 시대다. 전국에 퍼져있는 수목원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다. 그중에서 최근 산림청이 발표한 ‘2024년 꼭 가봐야 할 수목원 10선’에 오른 ‘한국도로공사전주수목원’(이하 전주수목원. 전주시 덕진구 소재)은 국내에선 유일하게 공기업이 운영하는 수목원이다. 입장료가 없다. 첫 삽을 뜬 때는 1974년. 고속도로 건설로 훼손된 자연을 복구하자는 취지에서 조성됐다. 당시 뽑힌 나무들을 이곳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정식 수목원으로 개장한 해는 2007년이다. 처음엔 초라했던 수목원은 이제 전체 면적 29만1683㎡ 규모에 3899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성장했다. 암석원, 습지원, 들풀원, 장미원, 무궁화원, 죽림원, 교재원, 계류원 등으로 나눠져 있는 이곳은 구획마다 ‘랜드마크 광장’, ‘풍경쉼터’, ‘유리 온실’ 등이 배치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난달 전주수목원을 찾았다. 짙푸른 숲 사이에 통나무집이 보였다. 숲속 오두막이다. 아이들이 반색하는 이곳에는 동화책 여러 권이 비치돼 있다. 죽림원은 울창했다. 영화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결투가 금방이라도 펼쳐질 듯했다. 죽림원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25종의 대나무가 심겨 있다. 남부수종원에 들어서면 남쪽 섬과 해안에서만 자생하는 아왜나무나 황칠나무 등을 볼 수 있다. 양치식물원에도 볼거리는 넘친다. 허리를 숙여 잎을 자세히 살피니 모양이 마치 동물 이빨 같다. ‘양치식물’의 ’양치‘는 ‘양의 이빨’이란 뜻이다. 전주수목원의 여름이야말로 무궁화를 종류별로 감상할 수 있는 때다. ‘무궁화원’에 식재된 무궁화는 종류가 많다. 한참을 걷다가 ‘풍경 쉼터’에 도착하자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다. 추억 한장 남기기에 더없이 좋은 사진 촬영 장소다. 한옥식 격자 창틀로 꾸며진 곳인데, 연못과 숲이 사진의 배경이 된다. 국내 유일한 잡초 전시장도 있다. 85여종의 잡초가 식재되어 있다.
고불고불 난 길을 좀 더 걷자 요상한 이름의 꽃을 만났다. ‘미스김라일락’을 아시는가. 국내 자생 식물이 국외로 반출돼 역수입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미스김라일락’이 대표적이다.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인 엘윈 미더는 북한산 일대에서 자라는 털개회나무를 보고 반해 종자를 채취해 미국에 가져간다. 종자 개량에 성공한 그는 당시 채집에 도움을 준 한국인 여성의 성을 따 ‘미스김라일락’이라고 이름 붙였다. 향이 도드라지게 강했던 이 꽃은 1970년대 국내로 들어와 가정용 관상식물로 인기를 끌었다. ‘미스김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전북숲해설전문가협회 김경선 회장은 “전주수목원은 나무 수종도 많고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는 숲”이라며 “생태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평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숲도 마찬가지다. 전주수목원은 숲 해설가 동행 프로그램(선착순 25명)도 운영한다.(문의 063-714-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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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테이프 공장의 변신
미국이나 유럽에선 폐공장이 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많다.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공장의 실낱같은 생존 전략이었지만, 그 성과는 곱씹을수록 대단했다. 각종 전시와 볼거리로 무장한 공장은 여행객들을 끌어들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했다. 전주 덕진구 팔봉동에 있는 ‘팔복예술공장’(이하 ‘팔복’)도 그런 곳이다.
본래 이곳은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했던 ‘쏘렉스 공장’ 자리다. 또한 1989년 407일간 파업 투쟁을 벌인 노동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1979년 설립된 썬전자는 카세트테이프를 아시아 여러 나라에 수출할 정도로 규모가 제법 큰 회사였다. 1980년대 말 콤팩트디스크(CD)가 등장하면서 위기를 맞은 회사는 노사갈등에 직장폐쇄, 쏘렉스로 ‘사명 교체’ 등으로 대응하며 결국 1991년 문을 닫는다. 25년간 닫혀있던 이곳이 예술 여행지로 변신하게 된 데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폐산업 시설 문화재생산업’이 큰 역할을 했다. 대상지로 선정된 이곳을 전주시가 사들여 2018년 개관한 것이다.
팔복예술공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공장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굴뚝 중간 난간에 온몸이 분홍색인 사람이 망원경을 들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고 작품이다. 그물과 높이가 다른 모래더미로 만들어진 독특한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시간에 맞춰 비가 왔다가 그치는 오감 체험 공간을 만난다. 건물 안 골목마다 설치된 희한한 구조물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1만3224㎡ 규모의 팔복예술공장에는 ‘이팝나무그림책도서관’도 있다. 누리집에 들어가 ‘꿈꾸는 예술터-사전신청’을 클릭하면 다양한 놀이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일·월요일은 휴관) 전시장에서는 6월30일까지 ‘오(OH)! 마이(MY) 앤디 워홀’ 전이 열린다. 접근하기 어렵게만 여겨졌던 예술을 일상의 친근한 소재로 재편한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 앤디 워홀의 생애와 작업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주/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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