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변화의 물길 亞 바다는 잠잠하지 않았다

김용출 2024. 6. 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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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서 시작 중동·동아프리카 닿는 바닷길
외부 세력의 압력 증가하며 다채로운 변화
中해안 유럽 제국주의 세력 각축장 되기도
15세기부터 500여년 걸친 亞 바다의 역사
인류학·미술사 등 다양한 방법론 활용 추적

아시아 500년 해양사/ 에릭 탈리아코초/ 이재황 옮김/ 책과함께/ 3만5000원

“정화의 지휘함과 70년 후 항해를 통해 ‘신세계’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의 크기를 비교(추정)한 현대의 선화를 보면,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이베리아인들(콜럼버스 일행)은 기본적으로 노 젓는 배로 신세계를 발견했고, 거기에 비하면 중국 배는 항공모함이었다.”

중국 난징에서 가까운 동해안에서 대규모 배를 건조하고, 병사를 비롯해 선원, 상인, 외교관, 성직자, 첩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 2만여명이 탑승했다. 가족이 이슬람교도였던 윈난성 출신의 환관 정화가 이끄는 원정대는 중국 명나라를 떠나서 아시아 계절풍이 부는 지역으로 나아갔다.
한국과 일본에서 시작해 중국과 동남아, 인도를 거쳐 중동과 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아시아 바닷길의 500년 역사를 재조명한 책이 나왔다. 사진은 건설 직후의 싱가포르 항구.
이들은 긴 항해 끝에 몇 차례는 인도양으로 들어갔고, 최소 한 차례는 아프리카로 갔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기린 한 마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정화는 모두 일곱 차례나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목표는 돈이 아니라 명 제국의 위엄이었다. 아시아 바닷길 교류를 결정적으로 촉진한 15세기 명나라 정화의 원정이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시작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중동과 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아시아 바닷길. 아시아 동서 교류는 일찍이 육로뿐만 아니라 이 길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오래전 ‘와크와크’로 불리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판자를 댄 뗏목을 타고 해류를 따라서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로 갔고, 반대로 당나라 초기 흑인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아프리카 흑인의 존재도 동아시아에 알려졌다. 이에 따라 모가디슈, 몸바사 등 당시 동아프리카 해변 도시는 상당한 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나라 해안 도시의 대외무역 업무 담당관이었던 조여괄은 책 ‘제번지’에서 무역 접촉의 일부로 아프리카 산물과 민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그곳 여성들은 깨끗하고 품행이 좋다. 그 나라 사람들은 직접 그 여성들을 납치해 낯선 사람들에게 판다. 그 값은 자기네 내부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의 몇 배에 이른다.”
에릭 탈리아코초/ 이재황 옮김/ 책과함께/ 3만5000원
그럼에도 정화의 원정 이후 명나라가 해금(海禁·바다를 금지함) 정책을 펴면서 아시아의 바닷길은 유럽 세력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선두 주자였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열강이 차례로 아시아로 몰려왔다. 아시아 바닷길에 큰 충격과 함께 교류 역시 더욱 활성화했다.

“아시아가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하나의 크고 갈수록 여러 방식으로 연결된 ‘회로’로 발전했다. 이들 장소를 연결한 실은 무역이었지만, 특정한 유형의 무역이었다. 제국의 날개 위에 탄 상업, 또는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다른 제국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제국에 의해 추동된 상업이었다.”

외부 세력의 압력이 증가하고, 이에 토착 아시아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다채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중국 해안은 한동안 유럽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20세기 중반 제국주의 세력이 물러간 이후 아시아의 바다는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교통량은 급격히 증가해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로가 됐다. 더구나 중국이 팽창주의를 내세우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이 급성장하면서 아시아의 바다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1947년 네덜란드 밀수선(왼쪽), 인도네시아 카리마타해협의 원형감옥 등대. 책과함께 제공
10년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각지에 머물며 연구 활동을 해온 코넬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 ‘아시아 500년 해양사’에서 아시아 해양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500여년에 걸친 아시아 바다의 역사를 탐구한다. 제1부에서 아시아 바닷길 연결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고, 2부에선 해역에 초점을 맞춰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살펴본 뒤, 3부에선 불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바다를 통해서 어떻게 전래되고 지역을 바꿨는지를 검토한다. 4부에서는 부산을 비롯해 아시아 바닷길에 있는 주요 항구와 도시를 살펴보고, 5부에선 아시아 바닷길에서 중심 상품이 돼온 향신료와 진주, 해삼을 살펴보며, 마지막 6부에선 아시아 바닷길을 연결한 기술인 등대와 지도 등을 살펴본다.

저자는 역사학뿐 아니라 인류학, 고고학, 미술사,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방법론을 활용해 아시아 바다의 연결과 무역, 종교, 도시, 산물, 기술 6개 주제를 중심으로 500년 아시아 해양사를 추적한다. 거시적인 흐름을 조망하는 동시에, 특정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아시아 근현대 해양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시아 해양사가 매우 다채롭고 역동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규적인 무역뿐만 아니라 ‘밀수’가 인도양, 남중국해를 비롯해 아시아 해양 전반에 펼쳐져 있을 정도로 활발했고, 종교와 향신료 등 다양한 관념과 물질이 바닷길을 통해서 공유돼 왔다는 사실을.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커피는 홍해 회랑의 예멘에서 재배된 뒤 무역로가 통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상륙했고, 향신료는 아주 먼 유럽인들까지 끌어들여 제국의 질서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이와 함께 제국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주요 항구와 도시를 연결하며 발전시켰고, 등대로 바다를 통제하고 지도 개발을 통해 효율적으로 지배하게 됐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저자는 역동적인 아시아 해양사를 복원해냄으로써 아시아가 농경과 유목 중심의 대륙이었다는 오해와 편견을 벗겨내는 데 일정하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탐구를 바탕으로 중국이 팽창주의를 내세우는 오늘날, 아시아 바다의 미래를 전망하며 질문을 던진다. “중국이 해상 지배권을 그 목표의 하나로 삼는 새로운 영토 강국이 된다면 아시아 바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요컨대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저자는 책에서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예측하는 학문이 아니라 역사학을 했다며 역사를 통한 약간의 실마리만을 제시할 뿐이다. “아시아의 해로는 동아프리카에서부터 멀리 뻗어 태평양 중간에까지 이른다. 이 해로는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두려움 없는 상인들의 욕망과 능력이었다. 발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이동의 유산은 아직 우리와 함께 있다. 혈통과 이주 안에, 그리고 식민지와 무역 연결망 안에.”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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