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중·민희진 패션 완판… 욕하며 궁금해하고, 비난하며 사입는다
‘블레임 룩’의 세계
“김호중이 오늘 입은 옷 어디 건가요?” “김호중 경찰 출석 룩(look) 정보 좀 주세요”….
지난달 21일 음주 뺑소니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은 패션으로도 주목받았다. 소셜미디어(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그가 착용한 재킷은 명품 브랜드 ‘몽클레르’ 항공점퍼로 132만원, 신발은 ‘루이비통’ 제품으로 180만원, 안경은 ‘크롬하츠’ 제품으로 435만원짜리라는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이 제품들은 곧바로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검색 인기 순위에 올랐다.
지난 4월 걸그룹 뉴진스가 소속된 ‘어도어’ 레이블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이브가 제기한 경영권 찬탈 의혹에 대해 결백을 주장하는 민 대표의 기자회견이 온라인으로 생중계되는 동안, 그가 착용한 패션 아이템 정보를 공유하는 글이 온라인에 넘쳤다.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민 대표가 입은 일본 브랜드 ‘캘리포니아 제너럴 스토어’의 초록색 줄무늬 맨투맨 티셔츠와 ‘47 브랜드’ 제품인 파란색 야구 모자는 온라인 쇼핑 몰에서 완판됐다.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지면 피의자나 피고인의 패션이 덩달아 주목받는다. 이른바 ‘블레임 룩(blame look)’ 현상이다. ‘비난하다’는 뜻을 가진 영어 ‘블레임’과 차림새를 뜻하는 ‘룩’을 합성한 신조어. 영어권에는 없는 표현이라 ‘콩글리시’로 추정된다. 국어사전에는 ‘블레임 룩’이 아직 등재돼 있지 않다. 다만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사전 ‘우리말샘’은 블레임 룩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비난받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스타일을 따라 하는 차림새”라고 정의한다.
◇신창원 무지개 색 티셔츠가 시초
레임 룩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2007년. 학력 위조 및 횡령 의혹을 받던 미술관 큐레이터 신정아씨 관련 보도에서다. 신씨가 200만원대 ‘돌체 앤 가바나’ 재킷과 40만원대 ‘버버리’ 청바지, 200만원대 ‘보테가 베네타’ 가방, 20만원대 ‘알렉산더 맥퀸’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이 제품들에 대해 백화점 매장에 문의가 쇄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블레임 룩이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한국 최초 블레임 룩은 1999년 탈옥수 신창원이 체포될 때 입은 ‘미쏘니’ 무지개 색 티셔츠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노출된 이후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고, 값비싼 미쏘니 진품 대신 가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신창원이 있고 있던 티셔츠도 나중에 가품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2000년에는 ‘린다 김 선글라스’가 블레임 룩의 주인공이었다. ‘에스카다’ 선글라스 1005는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모델이었으나, 무기 거래 로비스트 린다 김이 그해 5월 검찰 소환 당시 착용하면서 인기가 치솟았고,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에 앞서 예상치 못한 매출 급등을 기록했다.
세모그룹 전 회장 유병언의 옷차림은 사후에 블레임 룩이 됐다. 2014년 세월호 사고 관련 수사를 받다 잠적한 유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 외투를 입은 채 발견됐다. 변사체가 신고 있던 신발에는 ‘Washbar’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명품 브랜드 와시바 신발”이라고 발표했으나, ‘Washbar’는 곧 ‘세탁할 수 있다’는 뜻의 독일어임이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국정 농단 사건은 많은 블레임 룩을 만들어냈다.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가 검찰에 출석하자 취재진이 몰렸고, 최씨가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마치 신데렐라처럼 벗겨지면서 바닥에 붙어 있던 로고가 드러났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프라다’. 72만원짜리 제품으로 큰 화제가 됐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는 덴마크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 입고 있던 패딩이 190만원대 캐나다 ‘노비스’ 제품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역시 금수저” 소리를 들었다. 노비스 측은 “우리 제품이 아니다”라고 황급히 반박하며 불똥을 차단했다.
국정 농단 청문회에서는 ‘이재용 립밤’이 화제가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입술에 립밤을 바르는 모습이 포착된 것. 그가 사용한 ‘소프트립스(Softlips)’는 2400원 정도 하는 저렴한 제품이었다. 당시 국내에 정식 유통되지 않던 제품이었으나, 이재용 립밤으로 유명해지자 가격을 올려 판매하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블레임 룩 넘어 법정 패션으로
“블레임 룩이 뭔지 몰라? 사람들 눈을 가리는 거야. 우리가 모시는 오너 일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가 아니라, 뭘 입고, 뭘 신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서 배우 김희애가 재벌가 자제의 검찰 출두를 앞두고 한 말이다.
비난하는 대상이 착용한 제품이 뭔지 궁금해하고, 더 나아가 따라서 구매하는 심리는 뭘까. 한국소비자원이 발간한 ‘소비자문제연구’(2020년 4월호)에 실린 ‘알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한 ‘블레임 룩’’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이 논문의 저자인 신성연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연구위원은 “블레임 룩은 설득 목적을 가지고 구매를 유도하는 일반적 광고와 달리 의도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노출”이라고 썼다. “인간은 긍정적 정보보다 부정적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데, 블레임 룩은 반사회적 행위나 범죄 같은 부정적 맥락에서 노출되는 제품과 관련해 발생하기 때문에 더 관심이 쏠린다”는 것이다.
블레임 룩으로 지목받는 브랜드들은 달갑지 않다는 입장이다. 여러 명품 브랜드에서 일해 온 마케팅 담당자는 “매출이 급등하고 제품이 완판되면 기분 좋지만, 비난받는 인물의 부정적 이미지가 브랜드에 덧씌워질 수 있다는 리스크가 더 크다”며 “블레임 룩에 엮이지 않는 게 최고”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블레임 룩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어권에는 이와 비슷한 ‘법정 패션(courtroom fashion)’이란 표현이 있다.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인공들이 판결이나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거나 조정하기 위해 법정에 나올 때 전략적으로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미국 뉴욕 상류층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가짜 상속녀’ 안나 소로킨은 판사에게 “여긴 법정이지 패션쇼가 아니다”라는 질책을 들었다. 소로킨이 옷을 차려 입느라 매번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해 다양한 브랜드와 룩을 선보이며 법정을 자신의 런웨이로 만들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소로킨이 미디어와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한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실제 미국 언론은 재판 내용보다 그가 어떤 브랜드를 입고 나왔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소로킨의 패션만 따로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팔로워가 5만명을 돌파할 정도였다. 이제 소로킨은 ‘사기범’보다 ‘스타일 아이콘’으로 더 인식되고 있다.
영화배우 귀네스 팰트로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스키장 뺑소니 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하면서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 언론에서는 “부유층이 많은 파크시티 배심원단이 자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려는 법정 패션”이라고 분석했다.
패셔니스타로 주목받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가 첫째 날 걸친 ‘더 로우’의 모스 그린 울 코트, 둘째 날 입은 ‘구프 G 레이블’ 크림색 니트 카디건과 체인 목걸이가 온라인에서 검색이 폭증했다. 팰트로는 최근 유행하는 ‘올드 머니 룩(Old Money Look)’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정치인이 논란을 피할 목적으로 블레임 룩을 사용하기도 한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파리에서 조기 귀국할 때 빨간책을 들고 있어 눈길을 받았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영어 원서. 2021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 의혹에 책임을 지겠다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이것은 실패한 블레임 룩의 한 사례로 남아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