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팩스·서류뭉치 웬말"... 경제 침체에 관료주의 깨부수려는 독일
⑥ 독일의 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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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영혼'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최근 독일 베를린에 이런 수식어를 단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독일인의 영혼'을 확인하고자 지난 4월 30일 찾은 박물관에선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유명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석고상이 가장 먼저 로비에서 관람객을 맞이했다. 조각의 시선은 그 앞에 수북하게 쌓인 팩스 기기들에 꽂혀 있었다. 그 옆으로는 서류 뭉치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로비를 거쳐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시야를 방해하는 모형 수풀을 헤쳐가야 했다. 수풀에는 책의 챕터나 법조문의 '조(條)'를 뜻하는 기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서류 뭉치를 든 해골 모형이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그 위로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환영합니다. 대기, 대기, 대기, 대기실에 오신 것을요."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수족관 안에는 손바닥만 한 달팽이가 여러 마리 놓여 있었다.
이 박물관은 독일 싱크탱크인 '새로운 사회적 시장 경제 이니셔티브'(INSM)가 임시 개관한 '관료주의 박물관'이다. 시대에 동떨어진 팩스 기기와 서류 뭉치, 전진을 방해하는 모형 수풀, 공무를 대기하다 백골이 된 사람, 느림의 상징인 달팽이까지···전시장 내 모든 것은 독일 관료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대체 독일 관료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길래 이런 박물관까지 생긴 것일까. 그 실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분투를 살펴봤다.
관료주의, 어디에나 있지만 독일에는 더 많다?
'관료주의: 업무의 분업화, 위계 서열, 업무 규칙 등을 특징으로 한 조직에서 보이는 행동 및 태도.'
중립적인 사전적 정의와 달리 실생활에서 관료주의는 부정어로 사용된다. 책임 떠넘기기, 보고를 위한 보고하기, 과도한 서류 요구하기 등 업무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행태가 관료주의라 불리곤 한다. 업무량이 많아 보여야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할당되고 조직의 파워가 더욱 커지는 공공 영역에서는 관료주의가 계속 불어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관료주의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독일의 많은 전문가들은 "유독 독일에서 심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독일 싱크탱크 독일경제연구소의 클라우스 하이너 뢸 선임경제학자는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독일은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행위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미리 규칙을 정해두는 일이 많다. ②연방 정부와 주(州)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법이 각기 다른 점도 관료주의를 강화한다. ③사회적·생태학적 책임을 구현하라는 입법 요구가 불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행정의 디지털화 정도가 더딘 점도 관료주의를 악화했다. 유엔 회원국의 행정 디지털화 정도를 측정하는 '전자정부 개발 지수'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독일은 22위를 차지했다. 주요7개국(G7)인 독일로서는 아쉬운 성적이다. 유럽연합(EU)이 사용하는 '디지털경제 및 사회 지수'로 봐도 독일은 2022년 기준 독일은 27개국 중 13위에 그쳤다. 토르스텐 알슬레벤 INSM CEO는 디지털화가 낮은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독일 사회는 '데이터 보호'에 과할 정도로 민감해서 이 점이 디지털화를 방해한다. 연방 정부는 전체 행정을 가다듬는 체계를 마련할 권한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관료주의는 꾸준히 확대돼 왔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독일 국가규제통제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연방 법률은 2014년 1,671개에서 올해 1,792개로 10년 동안 7.24% 증가했다. 정부가 승인한 연방 규정은 같은 기간 2,720개에서 2,854개로 4.93% 늘어났다.
관료주의는 개인은 물론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독일 타게스샤우, 베를리너모어겐포스트 등은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①필리핀에서 이주한 간호사 마리아 라폴스는 독일 입국 후 북동부에 있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州)에서 취업 비자를 받았다. 이후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에서 직장을 구했다. 그러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서 받은 취업 비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라폴스는 새로운 비자를 받아야 했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채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라폴스를 정규 인력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병원도 손해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②독일 연방 물류·이동국은 육로를 통해 상품을 운송하는 기업 및 운전사 등에게 각종 데이터를 정기적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동 경로 및 주·정차 장소를 도시명·우편번호까지 세세하게 기재해야 하고, 운반한 화물의 무게를 ㎏단위까지 세세하게 기재해야 한다.
"관료주의, 경기 침체 부추겼다"... 잇단 지적
워낙 고질적인 문제라 많은 이들이 무뎌졌던 관료주의가 '당장 혁파돼야 할 사회악'으로 부각된 건 최근 독일 경제에 심각한 경고음이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0.3% 감소했고, 독일 연방 정부 경제자문위원회에 따르면 올해도 0.2% 성장하는 데 그칠 전망이다. 경기 침체의 직접적 원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하던 독일의 에너지 비용 급상승, 독일산 제품에 대한 수요 약세 등이 두루 꼽히지만, 원인 진단 과정에서 관료주의가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재계를 중심으로 빗발쳤다.
특히 소규모 기업일수록 관료주의에 취약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체 경제 규모에서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독일로서는 더 아찔할 수밖에 없다. 독일 중소기업연구소(IfM)가 독일 기업 조사를 토대로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인 97%가 '수많은 법률과 정부 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고, 58%가 '향후 독일에 대한 투자를 피할 것'이라고 답했다. 알슬레벤 CEO는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관료주의에 수반되는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경쟁에서 도태되기 쉽다"고 말했다.
이에 '관료주의를 깨지 않으면 독일의 미래도 담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미래의 국력을 좌우하는 핵심 산업에서는 특히 투자·개발 등 모든 단계에서 '속도'가 생명인데, 독일의 관료주의가 이를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독일 마인츠에 본사를 둔 생명공학 기업인 바이오엔텍은 '독일 내 임상실험 절차가 까다로워 의약품 개발에 어려움이 있다'며 지난해 영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관료주의를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경기 침체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분출했지만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로도 여겨진다. 뢸 선임연구원은 "경제가 약화됐을 때 정치권에서 '관료주의 축소'를 자주 언급하는 건, 세금 사용 및 보조금 지급 없이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조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늪에서 탈출하자"… 온 사회가 나섰다
연방 정부는 관료주의 타파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지난 3월 법무부가 초안을 발표한 '관료주의 구제법안(BEG)'이 대표적 조치다. BEG는 기업인 및 경제인 단체가 관료주의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며 제시한 약 400개의 제안을 추려 만들었는데, '상법 및 세법 관련 회계 문서의 보존 기간을 10년에서 8년으로 단축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지난 2월 행정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온라인접속법 개정안을 마련했고, 향후 중소기업의 관료주의 부담 완화를 위한 특별 대책을 별도로 마련하겠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특히 연방 정부는 EU로 인한 관료주의를 해소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독일 관료주의가 내부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EU 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책임을 돌린 것이다. 독일 연방 법무부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제정된 EU법은 약 1,000개다. 이에 법무부는 △2029년까지 EU 규정을 1개 도입 시 2개 제거 △경제 관련 법에 일몰 조항 의무화 △EU법이 야기하는 관료주의 비용 산출을 위한 지수 개발 등 구체적 조치를 추진하겠다고 예고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프랑스와 'EU발(發) 관료주의 해소에 협력하자'는 내용의 결의도 맺었다.
일각에선 아직 구체적 조치가 취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부정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단 과거에도 BEG가 3개나 더 있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불신이 많다. 뢸 선임연구원은 "새로운 규제의 등장은 늘 기존 규제가 축소되는 것보다 속도가 빨랐기에 BEG의 성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땜질식 처방을 할 게 아니라 '구조적 개혁'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슬레벤 CEO는 "관료주의 평가·감시를 위한 독립기구 설립, 입법 전 '실험 단계'를 거쳐 해당 법이 비효율을 초래하지 않을지 사전 검증하는 제도 등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뀌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절박함 때문일까. 관료주의 타파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엿보였다. 관료주의 박물관에서 만난 독일인 미하엘은 "독일 관료주의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합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시도하는 게 낫겠죠."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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