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보험 있으시죠?” 돈 벌려는 병원 말에 혹하면 ‘공범’ 됩니다
“실비(실손) 보험 있으시죠?”
이 물음이 몇 시간 후 1000만원 가까운 돈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50대 한 남성 A씨는 최근 시골집에 가서 벌초를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처음엔 삐끗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출근을 앞두고는 아예 걷지를 못했다. 거의 기다시피 서울 강남 회사 앞 정형외과에 갔다. 접수대 직원의 첫마디는 “어디가 불편하시냐”가 아닌 “실비 보험이 있느냐”였다. 별 의심 없이 “네”라고 답한 뒤 의사를 만났다. “저희만의 노하우가 담긴 시술이 있어요. 두어 시간 걸리는데 두 발로 걸어 나가게 해드릴게요.” 걸을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A씨는 여러 동의서에 정신없이 사인을 하고 국소마취 후 시술을 마쳤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진짜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의사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디스크 수술이라도 받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죠. 그런데 간단한 시술로 낫다니 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죠.” 수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A씨는 진료 내역서를 받고 눈을 의심했다. “0이 몇 개야? 90만원이겠지? 아니, 900만원이 넘는다고?” A씨는 시술 전 비용과 관련된 안내를 전혀 받지 못했지만 이미 시술을 받기도 했고 또 낫기까지 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계산해야 했다. 카드 하나로는 한도 초과가 떠서 세 카드로 나눠 결제하는 굴욕도 맛봤다. 왜 이렇게 비싸냐는 항의 한마디도 못 했다. “실손 보험 청구를 하니 600만원 정도 돌려주더군요. 다 낫긴 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사기당한 기분이랄까. 시술 전에 금액을 안내받았다면 망설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실비 보험 있냐’고 물었을 테고요.”
A씨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정형외과만이 아니다. 피부과나 미용 시술을 하는 클리닉, 의원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B씨는 최근 한 피부과를 방문했다. 접촉성 피부염 때문이었다. 어디가 안 좋아서 왔는지 설명하자 직원은 대뜸 “실비 있으시죠?”라고 물었다. “잠시 고민했는데 없다고 하면 제대로 된 치료를 안 해줄 거 같아서 있다고 했어요.” 상의를 탈의하고 침대에 누운 채 의사와 증상 관련 대화를 주고받은 뒤 소독 처치 후 염증 주사를 맞았다. “레이저하면 금방 좋아지는데 하실 거죠?” “아, 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는데 머리 위에 이런 안내문이 있었다. “원치 않는 치료가 이뤄진다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 5분 진료받았나? 7만원이나 받더라고요. 황당했지만 또 치료받으러 가야 하니 별말은 안 했죠.”
일부 피부과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위한 시술을 미용 목적으로 방문한 고객에게 권하며 “실손 보험 되니까 돈은 돌려받으신다”며 노골적인 장사를 하기도 한다. 10만~20만원대 피부 건조, 피부 장벽, 무좀, 탈모 등을 위한 제품을 미용 목적으로 쓰면서 치료를 위한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정형외과 간판이 아닌 한 ‘클리닉’에선 200만원짜리 도수 치료 10회권을 끊으면 60만~70만원대 피부 탄력, 미백 시술을 끼워주겠다는 패키지도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도수 치료 1회 20만원 중 1만원만 본인이 부담하고 19만원은 돌려받는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실손 보험 청구는 10회 전부를 한꺼번에 말고 1회씩 나눠 청구하라고도 안내한다. 도수 치료 10회 받으면 필라테스나 PT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의원도 있다. 가벼운 골절에 MRI를 권유하고 태반 주사를 놔주는 곳도 있다.
이런 제안은 의사가 아닌 상담실장, 상담팀장, 코디네이터라는 직원이 ‘비밀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은밀하게 이뤄진다. “의사도 그렇지만, 환자도 싸게 좋은 제품으로 시술받으니 서로 눈감으면 되잖아요. 공범인 셈이죠.” 인터넷에 ‘실비 적용 가능한 피부과 시술 항목’을 검색하면 대놓고 제품을 홍보하는 피부과도 상당하다. 실제 실손 보험과 관련한 사기도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한 의사는 브로커 소개로 내원한 환자들에게 허위의 하지정맥류 수술비 영수증을 발급, 환자 700여 명이 실손 보험금을 청구하게 하는 방법으로 약 50억원을 편취했다. 의사는 징역 7년을, 브로커 3명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환자의 실손 보험을 볼모로 과잉 진료를 하는 의사는 과거엔 정형외과에 국한돼 있었지만 지금은 확대되는 추세다. 병의원에서 “실손 보험이 있냐”고 묻는 이유는 비급여 치료를 권하기 위해서다. 비급여는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전액 부담하는 항목으로, 실손 보험을 내고 있는 경우엔 계약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를 돌려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작년 실손 보험 적자가 2조원대에 육박했다. 신 의료 기술인 무릎 줄기세포 주사나 도수 치료 등 비급여 지급 보험금이 증가한 탓인데, 역시 과잉 진료가 문제라고 금융감독원은 지적했다. 금감원은 이들의 솔깃한 제안에 동조, 가담한 환자들도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싸게 받는다고 좋아하지만 불필요한 고가 치료를 받아 결국엔 전체 보험료가 상승하는 것”이라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고 말했다. ‘수백, 수천만 원도 아니고 10만원, 20만원 정도는 괜찮겠지’가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 한 번쯤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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