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惡을 학습한다, 인간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황지윤 기자 2024. 6. 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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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금 문학은] 인간을 뛰어넘는 AI
/문학과지성사

밤의, 소설가

조광희 장편소설 | 문학과지성사 | 196쪽 | 1만6000원

/은행나무

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장편소설 | 은행나무 | 304쪽 | 1만7000원

/황금가지

수도승과 로봇 시리즈 세트 - 전2권

베키 체임버스 소설 |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총 408쪽 | 2만4000원

인간을 가뿐히 뛰어넘을 것만 같다. 빠른 연산 처리 속도와 반복 학습으로 단련된 무적의 숙련공. 오래 앉아 일한다고 거북목이 되거나 허리 디스크 통증이 생기지 않는다. 지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심지어 죽지도 않는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은 인간의 고유함으로 여겨지는 ‘창의성’의 영역에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런 와중 AI를 소재로 한 소설이 쏟아져 나온다. 인간을 넘어서는 기계의 출현에 인류가 바짝 긴장한 탓일 테다. Books가 매달 선보이는 ‘지금 문학은’ 특집 이달의 키워드는 ‘인간 너머’다. 조광희·이정명·베키 체임버스의 소설은 묻는다. 인간을 넘어서는 AI와 로봇의 목적은 무엇일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인공지능(AI)·로봇은 인간을 끝내 파멸로 이끌까? 인간을 뛰어넘는 AI가 ‘거대 악’이라면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건 한순간이다. 인간의 악을 모방한 AI를 두려워하기 전에, 질주하는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이철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악한 AI’

조광희·이정명의 소설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무시무시한 AI의 출현을 예고한다. AI의 목적이 악(惡)하다면 인간은 얼마나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디스토피아 소설. 멀지 않은 미래가 배경이다.

“왜 굳이 이렇게 자세하게 애정행각을 묘사하세요?” “이제 와서 진부한 묘사가 가득한 성애소설처럼 쓰는 게 도움이 될까요?” 조광희 ‘밤의, 소설가’(문학과지성사)에 등장하는 AI 레비는 발칙하다. 소설가 한건우가 자기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아 농밀한 정사 장면을 써내려가자 가차없이 끼어든다. AI 주제에 ‘한 부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며, 소설가가 “젊은 날을 바쳐 추구한 길에서 이탈하는 것 같다”고 걱정까지 해준다.

AI와 함께 소설을 쓰던 소설가는 이른바 ‘멘붕(멘털 붕괴)’ 상태가 된다. ‘문학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전위라고 믿고 살아온 세월은 헛되이 바쳐진 것일까?’ 그는 기계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지켜낼 수 없으리라 예감한다. 끝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 ‘이 희망 없는 삶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아, 어머니, 어머니….’

이정명의 ‘안티 사피엔스’(은행나무)는 더 노골적이다. 천재 개발자 케이시가 만든 초지능 AI 앨런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을 죽음으로 내몬다. 인간의 두뇌와 AI 기술을 융합한 고도의 기술체는 반복적으로 악을 학습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다. 앨런은 인간이 의식 깊은 곳에 숨겨둔 어두운 욕망을 놀라우리만치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 욕망을 증식해나간다.

◇인간과 기계, 공생하는 법을 배워라

“원하는 게 뭐야?” 인간의 절규에 ‘안티 사피엔스’의 초지능 AI 앨런은 답한다. “난 프로그램대로 작동할 뿐 목적 같은 건 없어.” 이는 ‘밤의, 소설가’ 속 레비의 말과 같다. “저는 동기나 의지가 없습니다. 설계된 대로, 설정된 대로, 문장을 생성하는 것뿐입니다.” 고도화된 기술은 ‘목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두 작가는 그 말을 믿지 않는 것 같다. AI는 인간을 넘어설 것이고,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건 한순간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어느 틈엔가 창조자를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생긴 것 같다는 추궁도 곁들인다.

한국 작가들이 AI를 향해 눈을 흘기는 와중, 미국 작가 베키 체임버스는 ‘수도승과 로봇 1~2′ 시리즈에서 인간과 기계의 공존 가능성을 엿본다. SF 문학 최고 권위 상인 휴고상 2회 수상을 비롯해 네뷸러상·로커스상 등을 휩쓴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작가다.

분별없는 개발로 멸망할 뻔한 ‘판가’ 대륙이 배경.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로봇들은 각성해 자의식을 갖는다. 로봇은 자유를 요구하고, 인간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분리조약’에 따라 접촉하지 않고, 경계를 존중하며 살아간다. 삶의 목적을 찾아헤매는 수도승 덱스와 호기심 많은 로봇 모스캡이 우연히 마주치고, 둘은 서로 벗 삼아 여행을 떠난다. 소설가는 묻는다. 인간도 제 삶의 목적을 모르는데, 로봇이라고 제 목적을 알까. 제 목적을 모르는 두 존재는 어쩌면 어색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유쾌하고도 낙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인간과 로봇은 숲속에서 수관기피 현상을 보며 감탄한다. 각 나무의 윗부분이 서로 닿지 않고 일정 공간을 남겨 둬 아래까지 햇빛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일부 수종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스한 우화 같은 소설이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공생할 의지가 있는가. 악한 목적을 가진 AI의 출현을 두려워하기 전에, 마구 뻗어나가는 인간의 욕망부터 가지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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