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사도세자의 묘지글로 남은 영조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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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조 탕평책은 요즘의 협치
협치 없으면 반지성·몰합리 판쳐
22대 총선으로 ‘심리적 내전’ 심화
증오 파는 선동 정치 자제하길
」
사도세자의 비극은 조선 후기 맹목적인 권력 쟁탈전으로 내달린 당파 정치의 집단주의가 빚은 반지성과 몰합리를 상징한다. 광포 정치의 한복판에 있던 영조·정조가 탕평(蕩平)주의를 주창하고 실현하려 노력한 건, 극심한 당쟁의 폭력성과 맹목성을 생생히 목격,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탕평을 요즘 말로 치환하면 ‘협치’다. 협치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미학에서 시작된다. 그 지향점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이 협치의 필요충분조건을 망각하는 순간, 그건 정치가 아니며 권력 쟁탈을 위한 정치 놀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극단적 팬덤에 기댄 진영 정치의 블랙홀에 빠져 몇년째 허우적대고 있다. 급기야 같은 당 안에서조차 편이 갈리고, 맹목적 추종자들이 강성 팬덤을 이뤄 같은 편은 감싸고 반대편은 무조건 물어뜯고 공격하는 반지성과 몰합리가 판을 치고 있다.
극단적 팬덤 현상은 정치적 양극화를 가져왔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층이 각각 상대당에 대해 느끼는 비호감도는 90%에 육박한다. 지난 4월 총선으로 192대 108의 극심한 여소야대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나라가 ‘용산 대통령’ 따로 ‘여의도 대통령’ 따로인 심리적 내전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반대편을 토론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악마화하는 풍토에서 증오를 증폭시켜 적대적 갈등을 동원하는 선동의 정치는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제 편의 강성 팬덤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와 증오 키우기를 ‘연료’로 삼는 현실은 서글프고 가련하다.
며칠 전 막을 내린 21대 국회의 끝자락은 팬덤 정치의 민낯을 보여줬다. 민주유공자법등 민주당은 무더기로 법안을 단독 처리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보란듯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모두 제 편의 지지층만 의식한 ‘보여주기’였다. 여야가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엉뚱한 기세 대결을 벌이는 바람에 정작 시급한 인공지능 기본법이나 시민 생활과 직결된 고준위 방폐법, 민법 개정안등은 손도 못대고 폐기됐다. “허공에 헛주먹질하는 정치”(김진표 전 국회의장)에 또 국민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여야간 의석 차이가 더 벌어진 22대 국회는 벌써 조짐이 심상치 않다. 192석의 거대 야권이 이재명 대표 연루 의혹이 있는 쌍방울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검찰의 모해위증 교사 의혹을 수사하는 ‘대북 송금사건 조작 특검법’과 한동훈 특검법을 ‘1호 법안’으로 내놓으면서 정치 지축을 흔들고 있다. 권력 쟁탈을 노린 강대강의 막장 대결로 정치권이 최소한의 구심력마저 잃는다면 엄청난 혼란과 격변이 초래될지 모른다. 이 과정에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가 결합할 경우 빚어질 재앙은 상상 초월이다. 260여년 전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됐듯, 정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게 될 것이다. 새로 임기가 시작된 22대 국회의 역할과 임무가 어느 때보다 막중한 이유다.
다시 영조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층 전시실에는 자식을 비명에 보낸 영조의 친필 글이 전시돼 있다. “아,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13일의 일이 어찌 내가 즐거이 한 일이겠느냐”로 시작되는 묘지문엔 당쟁의 제물이 된 사도세자에 대한 심정이 절절히 녹아 있다. 나란히 걸린 ‘공적인 일에 힘쓰고 사사로움을 버려 탕평을 이루라’는 문구가 도드라져 보인다. 이 시대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화두 같아서다. 격랑의 시기를 헤쳐갈 22대 의원들이 각별히 가슴에 새기고 틈틈이 성찰해보면 좋을 듯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여의도 국회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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