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과장, 허언, 선동… 어느 “국뽕” 한국사 강사의 마지막 수업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3회>
거짓으로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할 수 있나?
며칠 전 서울 사는 한 지인이 물어왔다. 현재 1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한 “입 큰(big mouth)” 한국사 유튜버가 “조선시대”가 “일제 강점기” 때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았다면서 조선의 노비제까지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한다. 그 유튜버가 조선 500년을 통틀어서 양반 주인이 노비를 살해한 기록이 10건 이상 나오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며 지인이 물었다. “조선왕조 500년에 정말 그런 기록이 없나요?”
그 유튜버의 주장은 역사학의 기초 상식을 모르는 자의 아둔한 발상이다. 노비는 전답, 가옥, 가축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4대 재산이다. 인류사에 스스로 자기 집에 불을 놓은 광인(狂人)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가축을 죽인 주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노예를 함부로 죽인 노주(奴主)가 많을 수는 없지만, 저 유튜버가 말하듯 민본주의가 실현됐기 때문이 아니다. 소나 돼지도 잘 먹여야 깨끗이 관리해야 새끼들을 많이 쑥쑥 낳듯이 노비 역시 배불리 먹이고 잘 입혀야만 그 자식들이 많이 태어나 주인의 재산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노주(奴主)들의 노비 관리는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지독하게 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사료를 들추다 보면, 주인에게 죽임을 당한 노비들의 사례가 심심찮게 보인다. 그 “입 큰” 유튜버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런 사례가 10건이 넘으면 마이크를 놓고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반나절만 검색하면 누구나 어렵잖게 주인이 노비를 죽인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지면 제약 상 아래 13개의 사례만을 우선 소개한다.
1. <<태종실록>> 28권 1414년 9월 19일 기사에는 여씨(呂氏) 집안의 주인이 독약을 써서 권비(權妃, 顯仁妃)의 노비를 죽였다는 한 종의 증언이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기재돼 있다.
2. <<세종실록>> 64권 1434년 6월 27일 기사에는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를 고소(告訴)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때려죽인다”며 죄가 있는 노비라도 국법에 따라 적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형조(刑曹)의 상소가 보인다. 형조에서 이 정도 언급했다면, 당시 노주가 사적으로 노비들을 죽인 사례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형조에서 그러한 상소를 올려 노비 학살을 예방하려 했음에도 10년이 되지 않아 노비를 죽이는 사례가 또 발생했다.
3. <<세종실록(世宗實錄)>> 100권 1443년 5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왕실과 인연이 있는 이완(李梡)은 아홉 살, 열 살 난 노비 아이들이 옹주(翁主)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아비 석류(石榴)를 결박한 후 때려죽였다. 그 전후 사정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 세종은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진실로 좋은 법이라고 한다”며 한탄했을 정도였다(같은 책, 1444년 윤7월24일 기사).
4. <<세종실록(世宗實錄)>> 37권 1427년 8월 24일 기사엔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는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부인이 질투하여 덕금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해서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5. <<세조실록(世祖實錄)>> 37권 1465년 11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참판 조효문(曹孝門)의 첩 자식 조진경(曹晉卿)이 사내종을 시켜서 한 계집종을 그 자식이 보는 앞에서 다듬잇방망이로 내려치게 했다. 계집종이 죽지 않자 조진경은 피투성이 계집종에게 활을 쏘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다시 한 방 더 쏘아서 죽였다.
6. <<성종실록(成宗實錄)>> 48권 1474년 10월 10일 기사에는 북부(北部) 참봉(參奉) 신자치(愼自治)의 아내 이씨(李氏)가 신자치가 간통한 계집종 도리를 시샘하여 그의 머리를 깎고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부를 지져서 죽인 후 시신을 유기한 잔악한 사건의 기록도 보인다.
7. <<성종실록(成宗實錄)>> 96권 1478년 9월 9일 기사엔, 전 예조 정랑(禮曹正郞) 이병규(李丙奎) 등이 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에서 조비(曹婢) 춘비(春非)를 구타하여 살해한 사건에 관해 의론했다는 기록이 있다.
8. <<성종실록>>217권 1488년 6월 21일 기사엔, 쇠칼(金刀)로 노비를 죽여서 시신을 도성에 버린 한 흉악한 범죄와 관련하여 조정 대신들이 의논하는 장면이 보인다.
9.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60권 1505년 10월 3일 기사엔, 연산군이 직접 흥청방(興淸房)의 비(婢) 종가(從加)를 죽이고 그 시체를 자르고 쪼개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게다가 죄지은 공노비들을 데려와서 모두 그 참혹한 장면을 보게 하고는 그들을 처형해서 사방에 효수(梟首)했다는 기록도 있다.
10. <<중종실록>> 60권 1528년 2월 26일 기사엔, “진사(進士) 하억수(河億水)의 처 이씨(李氏)가 종 석을이(石乙伊)를 시켜 여종 복비(福非)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등장한다.
왕조실록뿐만 아니라 일기 사료와 문집 등에도 노주가 노비를 죽인 사례가 보인다. 우선 널리 알려진 다음 두 사건만 소개한다.
11.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일기 <<쇄미록(瑣尾錄)>>에 나오는 기록이다. 계집종 강비와 눈이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사내종 한복이 잡혀 오자 오희문은 큰 몽둥이로 70~80대나 그를 치라 명했고, 그 결과 한복은 옥중에서 칼을 찬 채로 숨을 거두었다. (1577년 6월26~27일 기록).
12. 18세기 말 서울의 유명한 문장가 이서구(李書九)는 집안 노비들에게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사내종 하나를 동구 밖에서 때려죽이라 했다. 이후 포도청에서 조사를 나오자 “내가 죽이라 했다”고 확인했고, 관리들은 알았다며 돌아갔다.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백년동안, 2018).
조선 노비제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물로 삼는 노예제는 본질적으로 노예의 인신을 구속·지배하는 합법적 폭력 위에서만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습법에 따라서 일탈한 노비를 폭력으로 다스린 오희문이나 이서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반면 술에 취해서 여종을 때려죽인 이병규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사형당해야 마땅하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여러 감형(減刑)의 이유를 만들어 내 그를 살려냈다.
아울러 이어지는 사건은 주인이 노비를 죽인 경우는 아니지만 조선 노비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이기에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13. <<영조실록>> 38권 1734년 10월 5일 기사에 따르면, 경기(京畿) 광주(廣州) 사람 김대뢰(金大賚)의 사내종 영만(永萬)이 김대뢰와 그 노비(奴婢)들을 포함해 무려 30여 명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숨을 부지한 김대뢰의 사내종 세적(世迪)은 영만을 제 손으로 죽이고 관아에 자수했다.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격분한 한 사내종이 울분을 참지 못해 주인과 동료 노비들을 다 같이 죽여버린 격정에 이끌린 범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개인의 단순 일탈이나 사회적 기현상이 아니라 노주와 노비 사이의 계급적 갈등이 빚어낸 광란의 학살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조선왕조를 기리는 까닭은?
“입 큰” 한국사 유튜버는 왜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는 조선 노비제를 미화하고 옹호하는 지적 만용을 부려야만 했을까? 일제 강점기에 비해서 조선시대가 훨씬 더 살기 좋았다는 “조선 제일주의”나 “우리민족끼리”의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대체 왜 조선시대가 미화되어야만 하는가?
자유, 민주, 독립, 인권, 법치 등을 건국이념으로 내건 대한민국은 주자학(朱子學)을 선양하면서 가혹한 노비제를 유지·강화했던 조선왕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다. 대한민국의 성립 자체가 조선왕조의 철저한 부정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정신적으로 조선왕조의 연장선에 서 있는 듯하다. 외국인이 경복궁을 둘러보고 나와서 광화문광장을 걸어가면 대한민국이 마치 조선왕조의 법통(法統)을 이은 입헌군주제의 나라가 아닌가 착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화폐를 보면 세종대왕, 이순신, 이퇴계, 이율곡, 신사임당 등 모두가 조선시대 사람들이다.
조선왕조는 고려 국왕들의 동상을 세우지 않았으며 고려 영웅들을 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유독 조선왕조의 인물들을 그토록 미화하고 숭모하는가? 왜 한국인은 지금도 조선시대 위인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서 살아가고 있을까? 철저히 단절되어 식초와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대한민국과 조선왕조가 오늘날 다수 국민의 의식 속에서 마치 같은 나라인 양 연속적으로 인식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뿌리 깊은 유교적 조상숭배의 유습인가?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는 1960~70년대 민족 교육의 산물인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던 1960~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국사(國史)는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국가 이념의 요체였다.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반만년 이어온 한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철두철미한 민족사관(民族史觀)을 주입받았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고유의 민족사관으로 전 국민적 통합을 도모했다. 중국공산당 시진핑 총서기가 오매불망 부르짖는 “중화민족,” 일본의 극우파가 외치는 야마토 민족주의, 북한식 기괴한 “김일성 민족”까지··· 여전히 동아시아 전역을 민족주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국사(國史) 열풍은 암암리에 조선(朝鮮) 미화로 치달은 혐의가 짙다. 해방 이후 인문학자들의 조선 미화는 무엇보다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우리 조상” 중에서 모두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민족의 스승을 찾아야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근대국가 형성기의 민족사관은 대중교육을 통해 전 국민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이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기의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로 촘촘한 그물처럼 뻗어나간 네트워크 국가라는 사실이다. 과연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21세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인도하고 계발할 수 있는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발휘하려 한다면,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 분명하게 가려야만 한다. 전통 비판 없는 전통 미화는 맹목(盲目)이다.
한편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만든다고 떠벌려 온 “국뽕” 중독의 그 유명한 한국사 강사는 이제 스스로 공언한 대로 마이크를 놓고 강의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스스로 역사 교사를 자처한다면 부디 100만 구독자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공언한 바를 그대로 지키길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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