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아닌 87년에 민주화 이뤄진 이유
강원택 지음
역사공간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중앙일보 1981년 5월 22일자 한수산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 324회)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제복’이 들어가는 이런 정도의 소설 표현에도 발끈했다. 보안사령부는 작가 한수산과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정규웅, 출판부장 권영빈, 출판부 기자 이근성, 시인 박정만 등을 연행해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었다. 신군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독점했던 제5공화국 시절 전방위로 억압받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쓴 『제5공화국』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설 때까지 한수산 필화사건을 포함해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학술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한 책이다. 12·12사태, 서울의 봄과 5·18 광주항쟁, 제5공화국의 출범과 몰락 등 역사적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시기를 차분하게 돌이켜보고 여기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무엇인지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했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기획한 ‘20세기 한국학술총서’ 총 50권 중 첫 작품으로 발간됐다.
유신독재체제가 박정희 정권 권력 내부에서 발생한 파열로 급작스럽게 막을 내린 1979년에는 왜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8년 후인 1987년에나 가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지은이는 두 시기에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민주화 열망 정도가 달랐던 데서 그 답의 한 부분을 찾고 있다. 광주에서의 희생과 전두환 정권의 강압적 통치는 역으로 1961년 이래 지속돼 온 군부 지배에 대해 시민사회가 온몸으로 저항하게 만든 민주화의 에너지가 됐다고 봤다.
이 책은 10·26 이후 신군부의 권력 야욕 배경을 파헤치는 동시에 민주화를 성취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당시 야당 지도자들의 분열에 대해서도 성찰했다.
무엇보다 두 차례나 체육관에서 치러진 대통령 간접선거를 통해 독재체제를 구축해 절차적 정통성을 결여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언론의 독점과 언론 통폐합, 언론인 강제 해직 등 언론 탄압과 길들이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5공 내내 가장 강력한 정권 저항 세력이있던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각종 강압적 조치도 세세하게 정리했다.
전두환 정권의 과는 물론 경제, 외교 분야 등에서의 공도 함께 평가했다. 70년대 말 경제위기의 극복과 고도성장 회복, 물가안정, 88서울올림픽 유치와 성공적인 개최 준비 등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긍정적으로 봤다.
지금 우리는 혼돈의 제5공화국을 거쳐 대통령 직선, 5년 단임제의 이른바 87년 체제에 살고 있다. 잊고 싶은 역사로 밀려난 제5공화국이긴 하지만 이 기간은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고취되고 민주화가 더욱 공고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단련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책은 5공을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데 한몫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khhan8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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