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마르크스주의자, 재일교포 북송 좋은 일인줄…1993년 실상 듣고 마음 바꿔"

최익재 2024. 6. 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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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 개선 활동 30년…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활동한 공로로 ‘물망초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세력이 북한 인권 상황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김상선 기자
1960년대 일본의 대학가 분위기는 좌파 일색이었다. 미·일 안보조약을 반대하는 과격 시위가 그치지 않았고, 교수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대자보를 내걸었다. 그 시절 좌파 지식인들 사이엔 북한을 이상향으로 보는 풍조가 만연했다. 1963년 도쿄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한 오가와 하루히사(84)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에 매료된 좌파 청년이었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철학사』를 읽으면서였다. 그랬으니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사회주의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희망에 넘쳐 북한행을 선택한 재일교포들에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모교의 교수가 된 그는 북한 정권이 가장 싫어할 만한 단체를 결성했다. 1994년 발족한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이다. 국제사회에서는 물론 한국 내에서도 북송사업의 실상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았고, 북한 인권 운동가들조차 북송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북송사업은 재일교포들 본인의 선택의 따라 조국(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 인도주의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누구나 배불리 먹고 교육·치료가 무상인 지상낙원”이라는 거짓 선전으로 재일교포들을 속인 사기극이었다. ‘지키는 모임’의 결성을 전후로 “차별을 피해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갔건만, 자본주의 물을 먹고 왔다거나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등의 이유로 북한 안에서도 차별에 시달렸다”는 북송 교포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이 속속 나왔다. 오가와 교수는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가 매년 5월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10년 이상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물망초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온 오가와 교수를 만났다.

오가와교수가 발행한 계간지 『생명과 인권』.

Q : 북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 : “1993년 일본 도쿄의 한 식당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던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듣는 자리였다. 그 식당 여주인에겐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다 북송선을 탔다. 10여 년만인 1979년 북한 당국의 허락을 얻어내 겨우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아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귀국했다고 증언했다. 이듬해 다시 방북해 들은 소식은 두 아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돼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성은 그런 사실조차 발설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였다고 했다. 남은 두 아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에서였다. 또 다른 여성은 오빠가 북한으로 건너갔는데 정치범으로 몰려 체포돼 죽었고, 남아있던 올케만 뇌물을 주고 겨우 탈북에 성공했다고 했다. 북한의 인권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육성이었다. 나는 원래 마르크스주의자였는데 그때 북한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의 인권 침해를 널리 알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북 인권 증진에 기여, 물망초인상 수상

Q : 마르크스주의자였다면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을 텐데.
A : “도쿄대 재학시절 학내 투쟁을 했고 교수가 된 직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한마디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당시의 나는 북한이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보내는 북송사업에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북한 정권이 주체사상을 앞세워 1인 독재체제 구축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나의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북한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개인 숭배에 몰두하는 독재국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독일 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국가의 요건으로 일당 독재, 비밀경찰, 강제수용소 등을 꼽았는데 북한이 이에 딱 맞는 나라가 된 것이다. 내가 북한 인권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젊은 날에 대한 반성으로도 볼 수 있다.”

Q : ‘지키는 모임’을 만들 무렵 한국에선 북송 문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A : “사실 한국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96년이다. 나보다 2년 정도 늦은 셈이다. 당시 막 출범한 한국의 ‘북한인권시민연합’과 의기투합해 북한 인권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을 노력을 했다. 그중 하나가 영어·일어·한국어로 된 『생명과 인권』이라는 계간지를 만들어 북한에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이다.”

Q : 최근 북한 정권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하는데.
A : “우리 단체는 북송 재일교포들이 겪었던 부당한 인권 탄압에 대한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앞서 기각된 두 번의 소송과 달리 최근 세 번째 소송에선 의미 있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 소송의 피고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지난해 10월 말 도쿄고등법원이 ‘북송 재일교포들이 북한을 상대로 낸 소송의 관할권이 일본에 있다’고 판결했다. ‘관할권이 없다는 1심 판결이 잘못됐다’면서 도쿄지방법원으로 사건을 환송했다. 북송 사업이 일본에서 시작됐고, 20년의 보상 시효가 있지만 소송을 제기한 탈북 일본인들의 가족이 북한에 남아있고 이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어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올해 안에 배상판결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으로 향하는 북송선을 타고 있는 재일교포 가족. 1959~84년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 명목으로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중앙포토]
탈북에 성공한 북송 교포들 중 일부는 일본 정부에도 사기극에 동조한 책임을 묻는다. 북송 사업은 국교가 없던 북한과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양측 적십자사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진행됐고, 일본 정부는 적극 협력했다.

Q : 국제사회는 북한 인권보다 핵·미사일 문제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A :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의원이 전한 일화다. 2001년 스웨덴의 예란 페르손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과 회담할 때 태 전 의원이 통역했다. 당시 페르손 총리가 의제에 없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핵 문제가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인권 문제가 남아 있어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은 ‘우리와 서방은 인권의 사회·정치적 개념부터 달라 합의가 쉽지 않지만 대화와 소통을 통해 차이점을 줄이면 인권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대화에 응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1부상에게 ‘유럽이 인권 대화를 하자는 것은 우리 내부를 파보겠다는 것으로 허용할 수 없다.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 강경 보수파를 눌러둘 수 있다. 유럽을 속이는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뒤 북한 외무성은 미국과 유럽이 인권 공세로 나오면 핵실험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핵위기를 고조시키면 어쩔 수 없이 ‘선(先) 핵, 후(後) 인권’ 상황이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처럼 북한의 교묘한 전략이 인권 문제를 어떻게 축소시키고 있는지도 면밀하게 평가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 장군·서재필 박사 가장 존경

Q :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A : “1960년대 초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철학사』에 등장하는 실학자 홍대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국과의 첫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은 18세기 조선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면서 철학적으로도 매우 출중한 인물이다. 홍대용에 대해 좀 더 알고자 연세대에서 1년간 연구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젊은 시절 서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시아가 서양에 비해 과학적, 논리적, 철학적, 비판적 정신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답습했는데 홍대용의 실학 정신에 푹 빠졌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20년 동안 ‘조선문화강좌’를 열기도 했다.”

Q : 이순신 장군과 서재필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는데.
A : “공교롭게 두 분 다 일본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나는 일본인이지만 국적과 무관하게 조국이 위험에 빠졌을 때 헌신적인 애국심을 발휘해 나라를 구하려 한 영웅이라는 점에서 두 분을 존경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 연구를 위해 ‘임진왜란 연구회’를 만들어 울돌목 등 전적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Q :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열성적인 북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이력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 진보 진영에 대한 생각은.
A : “과거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분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에만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고 있다면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같은 민족인 북한의 2500만 명이 노예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진보진영이 눈을 감아서야 되겠나. 원래 주사파였다가 1990년대 이후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든 분들도 한국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정답이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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