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서양화가 고희동…세 점의 자화상으로 남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100년 넘은 원서동 화가의 집
도쿄미술학교의 첫 한국인 입학생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고희동은 보성·중동·중앙·휘문 등지에 도화교사로 나가면서 미술부 제자들을 이 집으로 불러다가 석고 데생을 지도했다. 한국 서양화가 1호가 개설한 최초의 서양화 연구소였던 셈이다. 고희동이 서화 스승 안중식·조석진과 함께 최초의 미술가단체 서화협회를 결성한 것도 집을 지은 바로 그 해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살았다. 집은 세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2002년 헐릴 뻔했지만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나서 등록문화재가 됐다. 이후 종로구에서 사들여 2012년 고희동 가옥으로, 2019년 고희동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한국 서양화가 1호. 조선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그는 내내 이렇게 불렸다. 1915년 졸업 후 귀국한 게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매일신보는 그를 소개하기 위해 서양화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했다.
최초 서양화 연구소 열어 데생 지도
이렇게 서양화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그는 어떻게 유학 가 서양화를 공부하고 올 생각을 했을까?
조부부터 부친까지 3대가 중인(中人) 역관이었다. 의사·통역관 등 전문 기술을 가진 중인들은 빠르게 시류를 읽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부친 고영철(1853~1911)은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가 영어를 배워왔고, 2년 뒤 첫 미국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도 다녀왔다.(조은정, 『춘곡 고희동』, 컬처북스)
고영철은 셋째 아들 희동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고희동은 13세 되던 1899년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했다. 16~25세가 다닐 수 있는 학교였는데, 나이 제한도 무시하고 조기 입학시킬 수 있었던 수완이 놀랍다. 고희동은 교장 에밀 마르텔에게 프랑스어 통번역을, 수비대 장교인 비르코프에게 체육을, 레미옹에게 미술을 배웠다. 다른 학교에서는 ‘도화’라고 부르던 과목이었다.
레미옹은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프랑스인 미술가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 출신으로 1900년 공예학교 창설을 위해 궁정에서 초빙했다. 세브르제작소 같은 황실 공예학교를 만들겠다는 고종의 계획은 좌절됐지만 레미옹의 방한이 헛되지만은 않았다. 레미옹이 마르텔의 초상화 그리는 걸 본 고희동이 서양화의 생생한 사실감에 매료됐고, 후에 일본에 유학 가 서양화를 전공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9년 고희동은 “미술 연구를 위하여 일본국 동경에 출장을 명”하는 궁내부의 칙명을 받았다. 도화서 화원들이 소속돼 있던 장례원의 예식관으로 일하던 때였다. 출장이고, 관비 유학이었다. 미술이라는 신지식을 배워와 조선을 계몽하라는 거였다. ‘미술(美術)’은 1873년 일본에서 독일어 단어의 번역어로 탄생했고, 한국에서는 1881년 일본 조사시찰단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신기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1911년 출장을 명했던 궁내부가 사라졌다. 관리들도 해산했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고희동은 계속 미술학교 학생으로 지내며 방학이면 귀국해 조석진·안중식에게 서화를 배웠다.
‘최초’는 축복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했다. 고희동이 돌아본 유학 시절이다.
“석고상을 놓고 화가(이젤)에 목탄지를 낀 까루동을 버티어 놓고 죽죽 썩썩 그리는데 보기도 처음이요,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6년 만에 졸업인지 무어인지 종이 한 장을 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양화를 더군다나 알 까닭도 없고 유채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등 냄새가 고약하다는 등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고희동, ‘양화가 제1호’, 서울신문, 1959)
졸업하려면 자화상을 제출해야 했다. 현재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고희동의 졸업작품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다. 정자관은 관리가 집안에서 편히 쓰는 모자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가 고희동이 그린 자신의 모습은 망국의 관리였다. 한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였다. 뒤에서 빛이 들어오는 역광 효과에 피부에도 보라색 기운을 넣었다. 보이는 색이 전부가 아니라고, 빛에서 분해된 색을 조합하는 인상파의 보는 방식을 미약하나마 적용했다.
고희동은 이 그림을 비롯해 자화상을 세 점 남겼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과 같은 복장으로, 졸업작품을 위한 습작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재가 된 ‘부채를 든 자화상’은 흰 모시적삼 풀어헤치고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원 화가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자세다. 배경에 서양 서적과 풍경화를 공들여 그려 넣어 지식인의 면모를 강조했다.
1933년 화가의 저작권 주장하기도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최초의 서양화가였지만 서양화로 대성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고희동의 서양화는 이 세 점뿐이다. “생활과 동떨어졌기 때문에” 1920년 이후 동양화만 그렸다. 그렇다고 허망한 유학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 별도로 ‘서화협회’를 조직해 1936년까지 매년 전시회를 운영했다. 관 주도의 조선미술전람회가 조선의 미감을 지배하던 시절, 서화협회전의 존재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공포된 게 1957년. 이보다 훨씬 앞선 1933년 화가의 저작권을 주장한 것도 고희동이었다. ‘화가의 보수금 청구’로 당시 일간지들에 보도됐다. 조선견직회사 사장 민규식에게 비단 보자기 무늬 도안을 그려줬는데 돈을 받지 못해 이 회사를 상대로 그림값 청구 소송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자화상에 그렸듯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했기에 고희동은 ‘화가’라는 애매한 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높이는 데 힘썼다.
근대를 가로지른 많은 화가들이 그를 통해 서양화를 배웠고, 유학을 다녀와 화단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보성·중동·중앙·휘문 등 사립학교의 미술교사로 출강한 그의 제자 중에는 시인 이상, 1세대 서앙화가 도상봉·이마동·오지호·구본웅, 그리고 간송 전형필도 있었다.
가장 먼저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가 집단인 서화협회를 구성했고, 해방 후 최초로 예술원 회장이 됐고, 최초로 국전 심사위원장이 됐다. 1960년 4·19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참의원이 됐으나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돼 ‘최초의 화가 정치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술이라는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한 근대인, 고희동은 1965년 10월 영면에 들었다. 예총장(葬)이 7일 동안 이어졌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권근영 중앙일보 기자·미술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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