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어서 하는 골프_ 열여섯 이효송의 고백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 여자골프는 최근 한풀 꺾인 분위기였다. 해외 무대에서 우승 소식이 뚝 끊겼다. 다른 나라 선수들의 실력이 늘어 상향평준화가 이뤄진 영향도 있지만 한국 군단에 신바람을 일으킬 에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위기설에 더 무게가 실렸다.
그러던 중 2008년생 여고생 국가대표 이효송(하나금융그룹)이 정말 혜성처럼 등장했다. 골프계에선 워낙 신동으로 유명했지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메이저 대회에서 마지막 날 7타 차를 뒤집고 우승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효송의 5월 월드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파스컵 제패는 15세 176일의 JLPGA 투어 역대 최연소 우승, 한국 아마추어 선수로 12년 만의 JLPGA 투어 우승, 한국 선수로 4년 여 만의 JLPGA 투어 메이저 정복 등 여러 기록들로 수놓아졌다.
한국과 일본 투어에서 각각 상금왕을 차지한 이예원과 야마시타 미유(일본) 간 우승 경쟁을 뚫고 이효송은 17번 홀(파3) 2m 버디에 18번 홀(파5) 3m 이글 퍼트 성공으로 1타 차 우승을 완성했다. 프로 통산 64승의 신지애는 공동 4위에 자리했다.
5월의 어느 날 화창한 오후에 연습장에서 만난 이효송은 “연습은 오전에 다 마쳤다”고 하더니 인터뷰가 끝나자 다시 타석에 자리를 잡고 연습 모드에 들어갔다.
골프 처음 했을 때를 떠올려본다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할아버지가 치시는 연습장 따라가서 시타 클럽으로 쳐봤던 게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재미있었나?
“여름방학 때였다. 할아버지가 저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가실 순 없으니 연습장에 같이 데려가셨던 거 같다. 7번 아이언을 쳐봤는데 처음부터 재미있었다. 가족과 친척 중에 골프 즐기는 분이 꽤 있어서 그전부터 치는 걸 보긴 했었다.”
JLPGA 투어 우승 뒤 며칠 동안이 가장 행복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냈는지.
“우승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귀국해서 집(경남 창원)에 갔더니 오후였다. 고모랑 카페 가서 음료수 마셨다. 다음날이랑 그 다음날은 얼마 후 열리는 아마추어 대회 대비해서 답사 라운드를 다녀왔다. 전남 나주 골드레이크CC랑 경남 클럽디 거창에 갔고 그 다음날 연습장(경기 용인) 가서 레슨 받고 연습했다. 그렇게 계속 다녔더니 좀 피곤하긴 했다.”
집은 창원인데 레슨 받는 곳은 용인이다. 이동이 너무 힘들 것 같다.
“용인의 88CC 근처 아파트에 머무를 곳을 마련해 놓고 있어서 괜찮다. 대회 일정이 없으면 거의 용인에 올라와 있는 편이다.”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골프장인 88CC는 2010년부터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88CC 라운드 기회를 주고 연습장과 파3 코스까지 이용하게 해준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의 최혜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박민지, 방신실, 이소영과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김민규 등이 88CC에서 기량을 길러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이효송도 88CC 장학생이다.)
살롱파스컵 때 캐디가 일본인인 것 같더라. 소통의 어려움으로 큰 도움을 못 받았을 듯하다.
“골프장 소속의 일본인이었다. 기본적인 일본어는 알아듣고 말할 수 있어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일본어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배우게 된 건가?
“배웠다기보다 중학생 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그거 보면서 조금씩 익혔다. ‘주술회전’(신비한 능력을 가진 고교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대를 넘나드는 주술사들의 대결을 그린 시리즈)을 좋아한다.”
소바(메밀국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일본 매체에 크게 소개됐다.
“우승하고 기자회견에서 일본 음식 중에 어떤 거 좋아하느냐는 질문이 나와서 소바라고 답했는데 엄청 부각이 돼서 보도됐다. 다른 거 안 먹고 소바만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우승 뒤 현장 기자회견에서 일본어를 좀 곁들였나?
“너무 긴장이 돼서 거의 못했다. 고맙다는 마무리 인사만 일본어로 했다.”
2년 연속 출전한 대회라 코스가 좀 낯익던가?
“작년이랑 올해 골프장은 같은데 그 안에서 코스가 달랐다. 그래서 익숙하다고 하긴 힘들지만 코스 특징은 작년 친 곳과 비슷하긴 했다.”
작년엔 컷 탈락했는데 올핸 우승이다.
“작년엔 대담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올핸 작년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려고 의식했다. 그린 스피드가 작년과 비슷해서 좀 낯설지 않기도 했고. 스윙할 때마다 ‘급해지지 말자’ ‘하던 대로만 하자’고 계속 되뇌었다.”
마지막 날 강풍에 대부분의 선수가 타수를 잃었다. 바람이 어느 정도로 강했는지. 이때까지 경험한 가장 강한 바람이었나?
“일기예보로 봤을 때 초속 7m 이상 계속 부는 걸로 나왔다. 최대는 11m쯤이었다. 경험한 제일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가장 자신 있는 클럽은 무엇인지. 우승으로 안내한 3번 우드도 원래 자신 있던 클럽인가?
“웨지랑 쇼트 아이언 자신 있다. 잡았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잘 칠 수 있단 자신감이 든다. 50야드에서 100야드 거리 보내는 샷을 좋아한다.”
어린 선수들은 웨지 기술을 까다로워하기 마련인데 어떤 연습을 했기에 자신 있는 샷이 됐는지.
“연습하는 걸 좋아했다. 상상을 되게 많이 하면서. ‘저 지점 정도에 떨어뜨리면 이렇게 굴러가겠지’하는. 퍼트도 마찬가지다. ‘라인을 이런 식으로 타고 들어갈 거야’하는 식으로 홀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계속 상상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계속 연습했다.”
3번 우드는?
“그래도 나름 똑바로 보내는 건 자신 있었다. 마지막 홀 핀까지 남은 거리가 215m쯤 됐는데 그쯤이면 거리는 딱 맞을 거 같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쳤는데 딱 맞아 떨어진 거다.”
다시 치라고 하면 또 그렇게 잘 붙일 수 있을까?
“음···. 막상 잘 붙여야만 한단 마음으로 치면 그렇게 가까이 붙이진 못할 것 같다.”
일본 현지에서 선수나 관계자 등으로부터 들은 말 중 가장 기억 남는 건 뭔가?
“경기를 다 마치고 이동하고 있었는데 신지애 프로님이 지나가시는 거다. 수고했다고 하면서 손바닥을 먼저 내밀어주셨다. ‘나이스 플레이’라고 하면서. 그때 진짜 정말 멋있었다. 공식 연습 라운드 때 먼저 가서 인사했고 그다음부터 뵐 때마다 인사했었는데 마지막에 그렇게 또 축하를 받으니 참 좋았다.”
한 해 13승 기록도 있더라. 지금까지 아마추어 대회에서 개인 우승은 총 몇 번이나 한 건가?
“마흔여섯 번으로 알고 있다.”
지상파 방송 ‘영재발굴단’에도 나왔었는데. 요즘도 유튜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와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나갔었다. 어떻게 보면 ‘흑역사’라 안 본 사람은 계속 안 보면 좋겠는데 막을 수가 없다.”
왜 흑역사인가?
“볼 때마다 부끄럽다. ‘여전히 많이 무뚝뚝했구나’ 싶다.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무뚝뚝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래도 좀 웃는 편인데 그땐 거의 웃지도 않더라. 샷 하는 건 지금이랑 비교해도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은?
“내향적이긴 한데 그래도 막 노는 걸 싫어하고 그런 건 또 아닌 듯하다.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노는 거 좋아한다. 근데 어느 정도 시간이 넘어가면 너무 힘들어지긴 한다.”
골프는 어느 정도 시간이 넘어가도 재밌나?
“원래 하루 5~6시간씩은 연습했다. 손목 부상 이후에 연습량이 줄 수밖에 없어서 아예 안 한 날도 있었고, 해도 2시간 정도밖에 안 했다. 근데 그게 오히려 대회 앞두고 컨디션 관리에 괜찮게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아프지 않고 한창 연습 많이 할 땐 어느 정도로 했는지.
“새벽에 일어나서 10시간. 어프로치랑 퍼트에 매달렸다. 4학년 겨울이었을 텐데 한파에 연습장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전세 낸 것처럼 쳤던 기억도 있다. 건조하니까 손가락이 다 갈라졌는데 그래도 추운 재미로 즐기면서 연습했다.”
추운 재미?
“추울 때 연습하면 그 나름의 재미가 또 있다.”
골프 시작 이후로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있다 하는 게 있을까?
“특별한 건 없는데 일찍 일어나는 건 거의 어기지 않고 있다. 시즌이든 비시즌이든 무조건 일찍 일어난다. 시즌 시작되면 저도 모르게 새벽 5시나 늦어도 6시면 눈이 떠지고 비시즌엔 그래도 7시면 일어난다. 게을러지면 안 된단 생각에 그렇게 하고 있다.”
슬럼프도 있었나?
“길진 않았는데 중2 때랑 작년 초에 좀 힘들었다. 성적도 잘 안 나왔고 샷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돌아보면 특히 플레이를 이어가는 경기 운영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었다. 당시는 따로 배움을 받는 스윙 코치님도 없었고 저나 할아버지나 약간의 한계에 부닥쳤던 거 같다.”
할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어릴 땐 주로 할아버지가 골프를 가르쳐주셨다. 지금은 스윙 코치님이 따로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코치이자 매니저 역할까지 해주신다.”
롤모델로 김효주 선수를 말하더라. 2012년 JLPGA 투어 산토리 레이디스 때 김효주도 7타 열세를 극복하고 우승했다. 김효주도 그때 고교생이었고.
“김효주 프로님, 고진영 프로님을 좋아하고 닮고 싶어 한다. 미국 무대 활약 모습도 정말 멋있다.”
이효송 선수의 플레이를 아직 못 본 골프 팬이 많다. 굳이 따지자면 본인은 김효주 스타일의 골프를 하나, 아니면 고진영 스타일인가?
“저는 제법 멀리 치는 편이긴 하지만 장타자라고 불리는 선수들만큼은 못 친다. ‘따박따박’ 친다. 근데 또 공격적인 스타일이긴 하다. 그래서 굳이 비교를 하자면 고진영 프로님이랑 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다.”
앞으로 진로는 대략 결정했나? 어쩌면 일본 투어를 풀시즌 뛰는 자격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일본 투어를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나이 제한에 프로 턴은 아직 멀었고 일단 국가대표로서 역할을 잘하고 싶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도 추천 선수로 종종 나갔는데 생각보다는 좋은 성적을 낸 대회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작년 OK금융그룹 대회 공동 31등이 최고다. KLPGA 투어 대회 나가면 이상하게 움츠러들어서 제 플레이를 못했다. 국가대표 자격으로 나가는 6월 한국여자오픈이랑 추천 선수 출전인 9월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에선 좀 달라지고 싶다.”
내가 나한테 지어주고 싶은 별명은?
“강심장이란 얘기가 이번에 많이 나왔던데 그것도 좋다. 침착하면서도 공격적인 플레이를 한단 느낌이 잘 전달되는 별명이면 좋겠다.”
지도자가 본 이효송
“자기 할 일은 알아서 다 잘 해내는 어른스러운 친구예요.”(민나온 여자 대표팀 코치)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난 선수인 데다 지도자와 소통도 적극적입니다.”(이시우 스윙 코치)
이효송의 일본 메이저 대회 제패에 그를 가르치는 지도자들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평소 ‘포텐셜’이 남달랐고 큰 무대에서 적절한 시점에 터진 거라는 얘기다.
이효송은 우승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았을 지난달 13일에 국가대표팀 합숙에 들어갔다. 이달 열릴 한국여자오픈과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살짝 들뜰 만도 한데 이효송은 여느 대회 우승 때처럼 금세 잊고 다가올 대회의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2007년 메이저 대회 LPGA 챔피언십 3위 등의 성적을 남긴 민나온 여자 대표팀 코치가 이효송을 지도하고 있다. 민 코치는 “워낙 성격도 침착하고 ‘원래 잘하는 선수’”라고 이효송을 소개했다. “어린 나이에도 되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자기 할 일을 다 잘 알아서 하는 데다 멘탈도 강해서 긴장 상황이나 위기가 오더라도 잘 이겨내는 선수예요.”
민 코치는 일본 가기 전 집중적으로 연습한 퍼트가 주효한 것 같다고 했다. “아이언 샷 정확성이 굉장히 높은 선수인데 퍼트의 경우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퍼트 성공률이 더 높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면서 “끊어치는 스타일에 크게 변화를 주지는 않더라도 스트로크를 좀 더 앞으로 보내주는 쪽으로 미세 조정하고 연습했다. 스트로크의 터치 감이 좋아진 덕에 그 전에는 홀에 걸리거나 돌아 나오던 퍼트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민 코치는 “4월 원주 성문안CC에서 열렸던 (국제 아마추어 대회인) 네이버스 트로피 팀 챔피언십 개인전에서 우승을 하고 바로 일본으로 가면서 좋은 흐름을 잘 탄 것 같다”며 “쉬고 싶은 마음이 클 텐데 그런 걸 잘 컨트롤한다. 하려고 하는 의욕이 워낙 강한 선수라 큰 성적을 내고 왔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또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대표팀 일정이 없을 땐 이시우 코치한테 배운다. 이시우는 고진영, 리디아 고(뉴질랜드) 등을 돕고 있는 코치다. 올 초봄부터 이 코치와 함께하고 있는 이효송은 “손목 부상이 있어서 그걸 의식하다 보니 너무 스윙을 팔로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시우 프로님을 찾아갔다. 지금은 손이나 팔을 덜 쓰는 대신 몸을 쓰는 스윙이 몸에 익어가고 있고 그 덕분에 손목에도 무리가 덜 간다”고 했다.
이 코치는 “이효송 선수는 백스윙 시작 때 손이 먼저 올라가는 까닭에 두 번으로 나눠지는 투플레인 스윙을 하고 있었다”며 “그런 스윙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손목 통증이 있다면 무리가 가는 동작일 수 있어서 원플레인에 가까운 느낌으로 가려고 선수와 의견을 나누며 고쳐갔다”고 돌아봤다. 이 코치는 “손목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기존의 스윙으로 좋은 성적을 내왔단 얘기니 손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코치 아카데미의 스태프가 일본 현지에서 이효송을 도왔고 이 코치는 대회 기간 스윙 영상을 전달 받아 원격 레슨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이 코치를 만난 뒤 곧바로 큰 성적을 낸 선수가 여럿이다. 리디아 고와 고진영, 박현경,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의 김주형이 그랬고 이효송도 같은 케이스다. 이 코치는 “선수와 코치 간 소통을 통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잘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양준호 기자 사진=오승현 기자 miguel@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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