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극단 대표’ 10년 “어린이극 가치를 삶으로…”
“저희 단원들은 휴대전화를 안 끄고 연습해요. 애들한테 연락이 올까봐요.” 문화예술협동조합 ‘아이야’의 정가람(45) 대표가 한 말이다. 아이야는 엄마들 모임에서 발전한 극단이라 이런 규정이 필요했다. 10년 전 정씨가 전업주부였을 땐 극단 대표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리산 산청에서 자란 그는 동네 동무들을 모아놓고 전날 방송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던 아이였다. 고등학생 때는 연극반 활동을 하며 배우를 꿈꿨는데 아버지가 배우보단 창작 쪽을 권하셨다. 그는 교수진이 화려한 서울예대 극작과에 입학했다. 그가 쓴 졸업 작품 <유실물센터로 오세요>가 학생들이 쓴 120편 중 네 편에 선정돼 무대에 올랐다.
고교 때 연극반 활동, ‘배우 꿈’ 키우다가
극작과 졸업한 뒤 뮤지컬 작업 등 경험
김민기 인터뷰 계기 어린이극 대본 써
아이 셋 출산 뒤 전업주부 생활 ‘우울증’
강동구 맘카페서 ‘마을 극단’ 제안한 뒤
엄마들 모임 열고 공모사업 응모·선정
“내 아이들 지역문화 누리는 모습 뿌듯
육아하는 엄마들로 ‘2기 공연팀’ 꿈꿔”
그는 대학을 1999년에 졸업하고 극단에서 인턴 작가로 일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일이 많아 다음해 국어 교사를 할까 싶어 국어국문학과로 편입했다. 얼마 뒤 김효경 연출가가 뮤지컬 작업을 한다고 그를 불렀다. “도착하자마자 인사하고 배우들 연습하는 데서 ‘이 대목 이렇게 써봐라’라고 하면 바로 쓰고 과외를 받은 거죠.” 작가 윤대성의 희곡 <방황하는 별들>을 뮤지컬로 새로 썼다.
2005년 동국대 대학원 연극학과에 들어갔더니 지도교수가 김민기 뮤지컬에 대해 논문을 쓰라고 권했다. 정씨는 학전 김민기 대표를 인터뷰하고 그 인연으로 학전 청소년·어린이극 대본을 쓰게 됐다.
2013년 셋째를 낳기 전까지 정씨는 대본 쓰는 일을 계속했다. “둘째까지는 데리고 연습실도 가고 했는데 아이 셋은 도저히 못 데리고 다니겠더라고요.”
전업주부로 6개월을 보내니 우울증이 왔다. 그가 일하자고 만 3살, 2살, 6개월 아이 셋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해 7월 그의 남편이 강동구 사회경제지원센터로 이직하면서 정씨도 그곳에서 개최한 협동조합 강의를 애들과 같이 들었다. 강의를 들으니 마을 극단을 협동조합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12월에 강동구 맘카페에 글을 올렸다. “제 소개를 하면서 마을 극단을 만들어보자 올렸어요.”
첫 모임을 근처 작은 도서관인 ‘함께 크는 우리’(이하 함크)에서 했는데 엄마 20명이 왔다. 공연예술 쪽 일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30대 엄마 일곱이 모이면 유치원도 안 다니는 아이가 15명이 모였다. 뭘 할 수가 없었다. 겨울이라 아이들 사이로 감기가 돌고 그때마다 엄마들이 떨어져 나갔다. 봄이 되자 엄마 다섯만 남았다. 마침 초기 마을 모임을 지원해주는 공모사업이 있었다.
마을 극단 ‘밥상’을 만들어 지원금 200만원으로 공연 2개를 무대에 올리는 사업계획서를 냈다. 밥상의 사업이 선정돼 막상 공연을 준비하려니 지원금으로 재료비 대기도 빠듯했다. 결국 그는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습하면서 무용 쪽 일을 한 엄마랑 “우리도 아시테지(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축제에 가는 날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당시 공연극인 <해님 달님>의 마지막 공연 연습은 아이들 재워놓고 밤 11시에 했다. 포스터는 부끄러워 붙이지 못하고 맘카페에 딱 한 번 홍보 글을 올린 게 다였다. 공연을 보러 올 사람이 없을 거 같았다.
2014년 7월 공연 당일 30~40명이 들어갈 함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애들만 150명 입장시켰다. 입장을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날 재공연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연 중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날 제가 막내 업고 조명이랄 것도 없어 불만 껐다 켰다 했거든요.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너무 벅차오르는 거예요. 내가 다시 할 수 있구나. 내가 정말로 이 일을 사랑했었구나! 그때 알았죠.”
같은 해 늦가을에 진행한 두 번째 공연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도 성공적이었다.
2017년에 사회적기업가 육성 과정을 통해 ‘문화예술협동조합 아이야’를 세우고, <똥꼬가 셋!>을 강동구민회관에 유료 공연으로 올렸다. 600석 전석이 매진됐다. 엄마들이 연극하면 아이들은 대사를 다 외웠다. “우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극을 만들면 나는 내 일을 하고, 내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 친구까지도 지역에서 문화를 누려요. 그러니까 나는 ‘우리 애들 나이에 맞춰 극본을 쓰기만 하면 되는구나!’ 했어요. 제가 논문 쓰면서 배웠던 어린이극의 가치를, 아이들을 키우면서 삶으로 느끼게 된 거죠.” 그는 김민기씨를 따라서 어린이들의 현실을 담은 대본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2019년 2월에 어린이들의 현실을 담은 <수상한 외갓집>을 무대에 올렸다. 2년 뒤 서울 아시테지 겨울 축제 공모에 <수상한 외갓집>이 선정돼 아이야 공연팀이 무대에 올랐을 때 그는 감회가 남달랐다. 엄마들과 첫 공연을 준비하며 했던 말이 실현됐기 때문이다. 공연을 위해 개인 돈이 얼마나 들어갔을까? “한 번도 공연에 우리 돈이 들어가진 않았어요. 회원들 출자금은 연습실 공사비와 보증금으로 들어갔어요.” 회원들 생활이 어렵지 않나?
“공연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강의 등을 해서 얻은 소득도 있어요.” 협동조합을 잘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회원들은 서로 자신들의 필요와 열망이 무엇인지 공유한다.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그 작업을 필요로 하는 구성원으로 팀을 짜 그들의 열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코로나19 기간엔 사업 다변화를 이뤄냈다. 고덕주공아파트를 테마로 상실감에 관한 설치예술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연극 놀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교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엔 목 디스크와 류머티즘이 와서 힘들었어요.” 공연으로 며칠씩 집을 비우면 괜찮을까? “큰애가 중3이고 아이들이 밥 담당, 설거지 담당, 빨래 담당을 정해서 다 잘 굴러가요.” 그리고 대본 초고가 나오면 아이들이 제일 먼저 읽어준다. 아이들이 그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저희처럼 육아로 지친 엄마들을 찾아 ‘아이야 2기’를 꾸리고 싶어요. 10년 전 저희가 마을과 사회적경제에서 받은 기회를 이어주는 ‘언니 아이야’가 되는 거죠.”
자신이 꿈을 이룬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육아라는 짐을 지고 길을 잃은 후배 엄마들에게 새로운 길을 내주고 싶다니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정가람씨가 어린이·청소년을 위해 좋은 공연을 많이 만들어주길 응원한다.
글 강정민 작가 ho089@naver.com
사진 강정민 작가, 정가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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