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가루 흩뿌리고…앤디 워홀이 본 ‘獨현대미술 거장’ [요즘 전시]

2024. 5. 3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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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Joseph Beuys, 1980년, 린넨에 아크릴과 다이아몬드 가루, 잉크 실크 스크린.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다이아몬드 가루가 뿌려져 반짝이는 모습 확대.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마치 아비뇽에서 두 명의 라이벌 교황이 마주한 것과 같은 의식적인 아우라를 느꼈다.”

미국의 저술가인 데이비드 갤러웨이의 표현을 빌리면, 두 거장이 만나는 순간은 이랬다. 이 둘은 소위 잘나가는 예술가들이자 미술사의 획을 그은 선구자들이었다. 바로 미국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과 독일 현대미술 거장 요셉 보이스.

두 작가가 바라보는 예술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워홀은 대량 소비문화의 획일성과 상업성을 풍자하기 위해 ‘공장형’으로 작품을 찍어냈다. 반면 보이스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행동주의에 예술이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엽서, 나무, 악기, 필름 등 기존의 오브제를 ‘사회적 조각’이라고 지칭하고 이를 작품화했다.

그런데 어쩌다 워홀의 작품에 보이스가 등장하게 된 걸까. 더 나아가 워홀은 보이스라는 인물, 또는 그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앤디 워홀(왼쪽)과 요셉 보이스. 루치오 아멜리오 [갤러리], 나폴리, 1980년.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1979년 독일 한스 마이어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보이스가 워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것이 이 모든 작품의 시작이었다. 그 후 보이스는 조지아 오키프 사진 촬영이 한창인 워홀의 미국 뉴욕 스튜디오에 방문했다. 펠트 모자와 낚시 조끼가 트레이드 마크인 보이스의 모습은 그렇게 워홀의 폴라로이드 카메라 렌즈에 담겼다.

서울 한남동 타데우스 로팍 서울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워홀의 개인전 ‘빛나는 그림자: 요셉 보이스의 초상’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보이스의 초상 연작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자리다. 이 이미지는 1980년부터 1986년 사이에 제작된 스크린 프린팅 초상화 연작의 근간이 됐다. 갤러리 측은 “워홀은 마릴린 먼로, 모나리자, 마오쩌둥 등 다양한 인물의 초상 연작을 많이 남겼다”며 “그런데 보이스 연작으로만 구성한 전시는 1980년대 이후 처음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다양한 색상, 구성, 재료로 보이스를 반복적으로 담아낸 보이스의 초상이 벽에 걸렸다. 초상화라는 틀 안에서 조금씩 다르게 실험해 만든 워홀의 초기작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예컨대 종이 작품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리거나 단조로운 단색 바탕 위에 실크 스크린 스텐실을 사용해 여러 색상으로 덧바르며 보이스의 머리와 어깨를 보다 선명하게 표현하는 식이다. 다른 예술가를 표현하는 데 특별한 가치를 둔 워홀은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실크 스크린 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트라이얼 프루프(Trial Proof)’ 스크린 프린트로 제작된 보이스의 초상 작품 확대 촬영. 표면에 드러나는 레이온. 이정아 기자.

이번 전시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보이스의 초상에서만 볼 수 있는 제작 기법이다. 바로 ‘트라이얼 프루프(Trial Proof)’다. 워홀은 보이스의 이미지를 변용하며 개별 판화를 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일무이하게 합성섬유인 레이온을 사용해 화면 표면의 질감을 살렸다.

워홀이 레이온을 재료로 활용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레이온은 신화처럼 미화된 보이스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1944년 보이스가 탄 비행기가 크림 반도에 추락했다. 그런데 보이스는 “추락 사고 후 12일 만에 타타르족 유목민이 자신을 발견해 치료해 줬고, 그들은 내게 타타르족의 일원이 될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보이스는 사고 이튿날 육군병원에 도착했던 것. 보이스가 전한 내용은 그가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워홀은 “타타르족 유목민이 당시 따뜻한 모포로 덮어줬다”는 보이스의 전언을 듣고, 그를 상징하는 초상을 작업할 때는 레이온을 사용했다.

앤디 워홀, Joseph Beuys (Beige background), 1980년, 캔버스 아크릴과 실크 스크린.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워홀과 보이스는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와도 인연이 깊다. 작가의 삶을 꿈꿨던 로팍 대표는 보이스의 작업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러나 로팍 대표는 작가를 후원하는 갤러리를 운영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는다. 로팍 대표는 갤러리 첫 전시로 워홀의 작품을 내걸고 싶었고, 보이스가 써준 추천서를 들고 워홀이 있는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홀은 “젊은 작가의 전시를 여는 게 좋을 것”이라며 자신이 아닌 다른 작가를 추천했다. 그 작가가 바로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였다. 그렇게 로팍 대표는 처음 문을 연 갤러리에서 바스키아 전시를 열었다. 당시에만 해도 바스키아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전시는 7월 27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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