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경청하는 눈동자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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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했을까.
예술 기록과 관련한 특강이었는데, 질문 시간이 되자 강연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대학 시절엔 그렇게 눈에 바짝 힘을 주고 강의를 듣다가 나른한 오후에 몰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해 외려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원고 마감이나 체력의 한계 때문에 강연 제안을 사양하기도 하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밥그릇에 고봉밥을 눌러 담듯 하고 싶은 말을 빼곡히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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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중요한건 청중과의 교감
책과 소설도 공감을 통해 울림
좋은 만남이란 마음을 여는 것
살면서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했을까. 스쳐 가는 몇 개의 기억 중에서도 유독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예술 기록과 관련한 특강이었는데, 질문 시간이 되자 강연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들으시던데, 궁금한 거 없으세요?"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 신경을 집중해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하던 중이었다. 강연 주제에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날은 앞에 서서 말하는 이의 모습을 하나하나 내 눈에 담고 싶었다. 대학 시절엔 그렇게 눈에 바짝 힘을 주고 강의를 듣다가 나른한 오후에 몰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해 외려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수강 인원이 대여섯 명인 소그룹 수업에서 그야말로 상모를 돌리듯 고개를 꺾으며 졸다 깨면 코앞에 앉은 교수자가 민망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아아, 강의가 지루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너무 집중하려다 보니 시신경에 과부하가 걸려서 그만.
그때 그 강연자의 마음을 느껴보라는 걸까. 이따금 연단 앞에 설 때면 밀려오는 졸음에 본의 아니게 상모를 돌리는 청중을 마주한다. 처음엔 그 모습에 당황하며 말을 버벅거렸지만, 이젠 그분의 꿀잠을 응원하며 넉살을 부린다.
"괜찮습니다. 제 소설집 제목이 '제 꿈 꾸세요'잖아요. 자면서 좋은 꿈을 꾸자는 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원고 마감이나 체력의 한계 때문에 강연 제안을 사양하기도 하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밥그릇에 고봉밥을 눌러 담듯 하고 싶은 말을 빼곡히 준비한다. 대본을 쓰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좍좍 그으며 더 매끄러운 말을 하기 위해 연습한다. 귀한 시간을 내어준 관객들에게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그런데 이 또한 눈을 부릅뜨며 과하게 집중하다 지쳐 곯아떨어지는 내 청자의 태도와 비슷한 걸까. 막상 사람들 앞에 서면 원고를 들여다볼 정신도 없이 마주 앉은 이들을 바라보느라 바쁘다. 때론 수줍고 때론 딴청을 피우고 때론 의문을 품은 듯한 그 눈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나를 만지고 있는 듯하다. 그 무언의 눈빛들과 연결돼 있으면 계획한 말은 뒤로 물러나고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그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싶어진다.
"저도 여러분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때론 북토크에 온 독자들에게 마이크를 넘기기도 한다. 한번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읽는 마음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관객들에게 물었다. 그때 한 분도 빠짐없이 자기의 경험과 느낌을 말해주던 기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또 어느 자리에선 관객들 사이에 특별한 공감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누군가 글쓰기에 관한 자신의 고민이나 소설 속 인물이 겪은 것과 비슷한 자신의 아픔을 진솔하게 꺼내 보일 때면 그 상실감과 걱정거리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안에 소리 없이 퍼지며 잠시나마 버거운 짐을 함께 나눠 갖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책은 그렇게 연달아 울리는 누군가의 메아리 같은 게 아닐까. 소설이란 건 다른 이가 숨을 불어넣을 때만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의 울림통이 아닐까.
청자와 화자를 오가며 느끼는 것은 말하는 이의 언어보다 듣는 이의 귀가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만남이 되는 열쇠는 정해진 위치가 아니라 얼마나 그 순간에 마음을 여는지에 달려 있다. 실은 그 마음을 여는 게 어려워 나는 그토록 눈을 부릅뜨고 빽빽한 대본을 적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눈빛과 목소리가 오갈 수 있도록 나를 여는 일. 그 즉흥적이고 우연한 연결에 몸을 맡기며 더 잘 말하고 싶다는 부담이나 긴장을 내려놓는다. 귀 기울이고 다시 울려 퍼지는 그 마음들을 믿어본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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