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고기? 마 치아삐라”…두부로 평정한 울산 맛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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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MZ기자에게 '찐맛집' 소개라는 고역 아는 게 없으니 다리품, 말품을 팔아야 했다.
"하긴 우리 사위 새벽부터 그 많은 두부 만들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안 그런가? 손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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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귀하의 전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입 신고를 완료했다는 문자 한 통을 받은 게 지난해 12월1일. 울산에 정착한 지 반년도 안 됐다는 얘기다. 그런 내게도 부담스러운 마감이 ‘휙휙’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여기가 남구인지 동구인지도 모르는, 스물여섯 먹은 엠지(MZ) 기자에게 ‘숨은 찐맛집’ 소개라니.
MZ기자에게 ‘찐맛집’ 소개라는 고역
아는 게 없으니 다리품, 말품을 팔아야 했다. 외지인들은 열에 아홉, 울산 하면 고래고기부터 떠올렸으나 취향도 아니고 지향하는 가치와도 안 맞았다. 연재기획이 시작된 올해 초부터 취재가 끝난 뒤엔 머쓱하게 “저, 팀장님(과장님). 다름이 아니라…’ 하며 기획 취지를 주저리주저리 소개했다. 그렇게 4개월을 ‘맛집 탐문가’라는 부캐로 변신해 울산 바닥의 ‘식도락 공무원’을 찾아 헤맸다. 수십 명의 공무원 입에서 다디단 밤양갱처럼 2명의 공무원 이름이 중복 거론됐다.
지난 9일 낮 울산 남구 신정동. 단독주택과 아파트 단지가 뒤섞인 동네를 걸으니 볕 잘 드는 곳에 ‘두부촌’이란 가게 간판이 보였다. “아! 배 기자님이세요?” 울산시청 대표 식도락가로 꼽힌 기획조정실 예산담당관 김아무개 과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자, 그러면 들어가실까요?”
‘맛집 소개’란 목적 하나로 인사를 주고받고 어색하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김 과장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방 쪽을 향해 익숙하게 주문을 넣었다. “여기, 중짜리 하나요.”
가스스토브가 식탁에 놓였다. 사장 배말이(72)씨가 냄비를 위에 얹고 불을 켰다. 뚜껑이 열렸다. 지름 26㎝ 원형 스테인리스 냄비에 알록달록한 식재료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단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두툼한 두부 조각이 냄비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은 건표고, 느타리, 새송이, 팽이버섯 자리였다. 배추, 미나리, 쑥갓, 청경채는 섭섭하지 않게 재료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3분 뒤 육수가 끓기 시작했다. 음식은 타이밍, 국자를 들 차례였다.
두부 한 덩이를 숟가락으로 떼어 입에 넣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 과장이 내 얼굴을 살피더니 씨익 웃었다. ‘어때, 한번도 못 먹어본 맛이지?’하는 표정이었다.
‘평냉’처럼 자꾸 생각나는 국물맛
공장에서 찍어낸 두부만 먹어본 내게 재래식 손두부는 새로운 세계였다. 비로소 두부 맛에 눈 뜬 기분이었다. 일단 식감에 놀랐다. “두부가 왜 이렇게 쫄깃해요?” 토끼눈을 하고 물었더니, 뒤 식탁 손님과 수다를 떨던 배 사장이 웃으며 “우리 사위가 직접 만들어”라고 했다. 생김새는 공장 두부와 다를 바가 없는데, 서걱서걱하거나 마냥 부드럽기만 하지 않았다. 쫄깃하고 탱탱했다.
이번엔 국물 차례. 한 모금 떠넣으니, 서울에서 맛본 평양냉면이 떠올랐다. 처음엔 심심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먹을수록 끌렸다. 앞접시째 들고 호로록 마셨다. 해산물 베이스 육수에 질 좋은 소고기와 채소가 한데 뒤섞여 탄생한 맛이었다. 한 양동이를 퍼마셔도 질릴 거 같지 않았다.
두부를 먹다 보면 바닥에 숨어있던 소고기와 당면이 드러난다. 간장 소스에 연하게 양념한 소고기라 두부 맛을 해치지 않는다. 뭔가 조화롭다. 숟가락에 두부, 소고기 올려 한입. 두부와 버섯 한입. 새롭게 조합해 먹는 재미까지 있다. 비법이 뭘까? 배 사장에게 물어보니 다음날 새벽 6시30분까지 식당으로 오란다.
다음날 새벽 6시. 졸음이 덜 가신 상태로 식당으로 향했다. 가게 앞을 서성이는 기자를 보자 배 사장이 배시시 웃으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배 사장은 나를 4평 남짓한 뒷마당 두부 제조실로 안내했다. 사위 손형석(41)씨가 12시간 불린 백태 콩 10㎏을 믹서기에 갈았다. 지름이 1m쯤 되는 솥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 간 콩을 넣고 한 번 더 푹 끓였다. 손씨가 익은 콩을 만져보더니 “밀었을 때 이 정도 으스러지면 딱 알맞아요”라고 했다. 나로선 전혀 감 잡을 수 없는 느낌이었으나, 이게 맛의 비법이라 했다.
맛이 탄생하는 곳, 4평 두부 제조실
으깨진 콩을 하얀 면 보자기에 넣어 짜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후 직접 제작한 가로 34㎝, 세로 44㎝, 높이 8㎝의 나무틀을 꺼냈다. 여기에 간수와 콩물을 붓고 휙휙 젓는다. 몽글몽글 순두부가 만들어진다. 30분쯤 지났을까. 나무 뚜껑을 여니 단단하고 뽀얀 두부가 보였다.
배 사장은 사실 1999년부터 울산 중구 태화동 불고기 단지에서 제주식 고깃집인 ‘제주도새기’ 식당을 운영했다. 이 거리에 배 사장의 고깃집만큼 오래된 식당은 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단골이었던 두부촌이 가게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2년 여름이다. “고깃집을 오래 하기도 했고, 딸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큰 규모 식당을 운영하고 싶었어요. 두부촌 음식 맛이야 식당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인수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뜻을 전했죠.”
계약한 뒤 개업 전까지 두부 제조법을 전 사장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마침내 스승이 말했다. “그래, 됐어.” 손씨는 “콩 으깨짐을 파악하는 게 맛 내기의 척도인데, 그게 정말 어려웠다”고 했다. 배 사장은 사위 어깨를 토닥이며 “요즘도 전 사장님이 종종 가게 오셔서 식사하고 간다”고 했다. 맛은 한결같으니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이거 좀 들어봐요. 아침에 바로 낸 순두부는 꼭 먹어봐야 해.” 작은 뚝배기에 배 사장이 맑게 끓여낸 순두부를 담아 내왔다. 배 사장은 “연세가 좀 있으시거나 위장이 안 좋은 손님들이 부탁하면 여기에 계란만 툭 풀어서 드린다”고 했다. 뽀얀 순두부에 간장을 둘러 한입 떴다. 콩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보들한 순두부를 호호 불어 식혀먹다 보니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났다. 빈속이 이내 편하고 든든해졌다.
당일 만든 두부만으로 요리하는 철칙
두부촌은 당일 만든 두부만 판매하는 게 가게의 운영 철칙이다. 배 사장 가족에게 인사하며 귀엣말하듯 속삭였다.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재료를 다듬던 배 사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긴 우리 사위 새벽부터 그 많은 두부 만들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안 그런가? 손 서방.”
배현정 기자 spr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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