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노·통화’ 곳곳에 드리운 尹 그림자…공수처 ‘뇌관’ 뚫을까

이혜영 기자 2024. 5. 3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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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 받아든 공수처, ‘수사 외압 의혹’ 실체 규명해야
尹-이종섭 통화기록 확인됐지만…‘직권남용’ 혐의 입증은 별도 문제

(시사저널=이혜영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7월31일 실제 '격노'했을까. 격노했다면 누구를 향한 것이었고, 강한 질책과 동시에 어떤 내용의 '지시'를 했을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규명해야 할 핵심 쟁점은 윤 대통령이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 결과를 확인한 후 실제 격노했는지, 그리고 '구체적 지시'까지 내놓았는지 여부다. 대통령의 격노는 수사 외압 의혹의 진원지이자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지만 얽히고설킨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한다면 수사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게 된다. 2기 체제에 돌입한 공수처가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거나 초라한 결과물을 내놓을 경우 22대 국회 출범과 동시에 채 상병 특검법의 가장 강력한 불쏘시개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9월15일 인천항 수로 및 팔미도 근해 노적봉함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에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31일 VIP는 누구에게, 왜 '격노'했나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선 △해병대 수사단에 '혐의자와 혐의를 특정하지 말라'는 지시가 전달된 경위 △경찰로 이첩된 수사기록이 회수된 과정 △국방부 조사본부의 사건 재검토 및 지휘 과정 전반에서 펼쳐진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주목할 점은 지난해 7월31일을 기점으로 변곡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7월20일 채 상병 사망 확인 직후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 7월28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유족 측에 수색작전을 지휘·감독한 8명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한다는 계획을 설명한다. 8명 중에는 임성근 제1사단장도 포함됐다. 7월30일 박 전 단장은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동일한 내용의 결과를 대면보고 했고, 국외 출장을 앞두고 있던 이 장관은 보고서 결재까지 완료했다. 대면보고에는 김 사령관과 박진희 국방부 군사보좌관을 비롯해 해병대·국방부 관계자들도 배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은 군 사망 사건 수사권을 가진 민간경찰로 이첩돼 왜 해병대원들이 기본적인 안전장비조차 없이 무리한 수중 수색에 투입됐는지 규명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7월31일부터 상황은 반전을 거듭한다. 이 전 장관은 결재 이튿날 돌연 보고서 이첩 보류를 지시한다. 해병대 사령부는 언론 브리핑 등 예정된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유재은 전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박 전 단장에게 경찰 이첩을 중단하고 '혐의자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내용을 빼라'고 요구한다. 박진희 군사보좌관은 김 사령관에게 연락해 혐의가 적시된 8명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 요청한다. 박 전 단장과 해병대 지휘부, 국방부 관계자들의 발언과 요청은 결국 임 사단장을 제외하라는 취지였다.

국방부 전체가 장관 결재 사안을 뒤집고 나선 데 대해 박 전 단장은 "도대체 국방부가 왜 그러는 것이냐"고 김 사령관에게 물었다. 이때 'VIP 격노'가 등장한다. 김 사령관이 "오전 대통령실 VIP 주재 회의에서 1사단 수사 결과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됐다"고 설명했다는 게 박 전 단장 주장이다.

윤 대통령도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격노'와 관련해 언급했다. 다만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수사 결과와 관련해 격노를 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통령은 '무리한 수중 수색'을 지시한 점을 질책했다고 답했다.

VIP 격노를 둘러싼 핵심 인물 간 진술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두 차례 소환조사를 받은 김 사령관과 국방부-해병대를 오가며 수사 관련 구체적 요구를 했던 유 전 법무관리관은 대통령 격노가 있었고 이로 인해 수사 외압 의혹으로 사태가 확산한 점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공수처는 김 사령관 휴대전화 녹취록에서 박 전 단장 외 또 다른 인물과 이를 언급하는 내용을 확보했고, 김 사령관으로부터 이를 직접 들은 당사자 진술까지 확보한 상태다.

김 사령관에 대한 3차 소환을 검토 중인 공수처는 이 전 장관과 당시 '격노' 회의에 있었던 국가안보실· 비서실 관계자를 차례로 불러 이를 확인할 방침이다.

8월2일 이첩·회수 당일 尹-이종섭 18분 통화

대통령실과 국방부 차원의 수사 외압 여부를 밝히려면 유의미한 물증과 이종섭 전 장관을 비롯한 핵심 관계자들의 진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격노설을 강력 부인하며 "대통령과 통화한 적 없다"던 이 전 장관은 8월2일 세 차례에 걸쳐 윤 대통령과 총 18분40초간 통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진술 신빙성에 의구심이 커진 상황이다.

항명 혐의로 군사법원 재판을 받고 있는 박 전 단장 측이 통신사실조회를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지난해 8월2일 낮 12시7분과 12시43분, 12시57분 3차례에 걸쳐 이 전 장관에게 개인 휴대전화번호로 연락했다. 통화는 각각 4분5초, 13분43초, 52초간 이뤄졌다. 당시 이 전 장관은 우즈베키스탄 출장 중이었고, 윤 대통령은 비화폰이 아닌 자신이 검사 시절 사용하던 번호로 전화했다. 급박하고도 예상치 못한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수사 외압' 의혹 핵심 인물인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유재은 전 국방부 법무관리관(왼쪽부터) ⓒ연합뉴스·시사저널 박은숙

8월2일은 외압 의혹의 한 축인 수사보고서가 회수된 당일이다. 해병대 수사단은 이날 경찰에 업무상과실치사 혐의(8명)를 적용한 보고서를 이첩했고, 국방부 검찰단은 당일 보고서를 회수했다.

보고서가 이첩되고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간 첫 통화가 이뤄졌다. 약 30분 후 윤 대통령은 다시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은 14분 가까이 긴 대화를 나눈다. 이 두 번째 통화가 이뤄지는 동안 박 전 단장은 보직해임을 통보받았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간 세 번째 통화가 끝난 후 국방부는 경찰에 보고서 회수 의사를 밝혔고, 유재은 법무관리관이 회수 시점, 형식 등을 협의했다.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이 유선으로 유 관리관에게 연락한 것도 바로 이때다. 국방부 검찰단은 오후 7시20분쯤 경북경찰청에 제출된 보고서를 회수했다.

윤 대통령은 8월8일에도 이 전 장관에게 개인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이 시점은 국방부 검찰단이 박 전 단장을 집단항명수괴 혐의로 입건한 날인 동시에 보직해임을 결정한 때다. 이 전 장관은 윤 대통령과 통화한 시기를 중심으로 김용현 대통령 경호처장과도 8차례 통화했다. 경찰을 관할하는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 방문규 당시 국무조정실장 및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도 연락했다.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을 각각 보좌하는 임기훈 국방비서관과 박진희 군사보좌관은 7월31일부터 8월8일까지 총 25차례나 연락을 주고받았다.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진 기간에 이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정부, 여당 의원들과 광폭 연락을 반복하는 사이에 국방부는 채 상병 사건 재검토에 착수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기존 8명에서 임 사단장을 포함한 6명을 빼고 2명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경찰에 재이첩했다. 대통령 격노와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진 상황 초기부터 의심받던 '임성근 구하기'가 결과적으로 보고서에도 반영된 것이다.

오동운 신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5월22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을 마친 후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수처의 시간, '직권남용' 입증될까

현재까지는 통화 '내역'만 확인된 것일 뿐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이 전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장관·의원 간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통화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이 전 장관 측은 통신기록이 확인되자 입장문을 내고 "8월2일 대통령과 장관의 통화 기록은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수사 지시나 인사 조치 검토 지시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대통령실도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통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해외출장 중이더라도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실시간 논의를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대통령이 왜 검사 시절 쓰던 사적 번호를 이용해 연락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공수처는 시간을 벌게 됐지만 수사가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통령의 격노가 구체적인 지시나 외압으로 이어졌는지, 윗선의 개입 범위 등을 밝히려면 대통령실까지 포함한 강제수사가 필요하지만 수사는 여전히 김 사령관을 비롯한 해병대 쪽에 쏠려있다. 공수처가 이 전 장관의 통신기록을 확보하고도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이와 관련한 가시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력 부족 등 현실적인 한계에 다시 발목이 잡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윤 대통령이 고발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는 입증이 까다로워 '격노' 정황에서 더 나아간 물증과 구체적인 지시 사실을 확보하는 것이 쟁점이다. 법조계에서는 윤 대통령이 격노를 했더라도 이것만으로 혐의가 성립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사실관계와 법리를 촘촘히 엮지 못하고 사건을 검찰에 넘길 경우 공수처 판단과 정반대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통령이 수사보고서를 듣고 격노를 했더라도 직권남용 혐의가 인정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만일 민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해 경찰청장 등 윗선이 살인 교사범으로 특정된 인물을 혐의 적용에서 빼라고 한다면 직권남용 여지가 있지만, 이 사건의 경우 군인 사망 사건을 민간으로 이첩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해병대 수사단 차원의 조사를 끝내고) 경찰에 이첩하면서 누구를 입건할지, 혐의는 어떻게 할지 등은 말 그대로 넘기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절차상 중대한 의미가 있지 않다"며 "특정 인물을 입건하든 안 하든 사건 전체를 경찰이 이첩받기 때문에 이를 직권을 남용해 (해병대 수사단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결론짓기는 무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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