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챔피언?골드챔피언? 그래서 ‘지구1짱’이 누군데 [올어바웃스포츠]
삼국지를 끝낸 나라가 위촉오가 아닌 사마의의 진나라인 것처럼 헤비급의 최종 승자도 3강이 아니었습니다. 아래 체급에서 올라온 우크라이나의 올렉산드르 우식이 퓨리를 판정승(2대1)으로 꺾은 것입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세기의 대결에 걸린 수많은 벨트입니다. 퓨리는 세계복싱평의회(WBC)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우식은 세계복싱협회(WBA), 국제복싱연맹(IBF), 세계복싱기구(WBO), 국제복싱기구(IBO)를 보유중이었습니다.
복싱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수많은 챔피언 벨트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챔피언은 1명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죠. 도대체 복싱은 왜 이렇게 많은 챔피언들이 난립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진짜 ‘지구1짱’은 어디서 확인해야 할까요?
그러나 ‘적어도’ 현재 4대 주요 복싱단체로 평가받는 WBO는 아니라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타이슨도 엄연히 WBO 헤비급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시 군소단체에 불과했던 WBO는 알려지지 않은 선수인 프란체스코 다미아니를 첫번째 헤비급 승자로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복싱판은 정말이지 많은 단체들과 많은 타이틀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WBA, WBC, IBF, WBO 등 주요단체뿐 아니라 IBO, IBU(국제복싱연맹) 등 마이너 단체들도 다들 자신들을 인정해달라고 주장하고 있죠. 앞서 말한 우식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IBO 타이틀 방어전을 꼬박꼬박 치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단체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각 단체들도 한 체급에 여러 타이틀을 내걸고 있습니다. WBA만 해도 2021년까지 한 체급에 정규 챔피언, 슈퍼 챔피언, 잠정 챔피언 그리고 골드 챔피언이란 4개의 타이틀을 내걸었습니다. 한 기관이 17개의 체급을 관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산술적으로는 68명의 챔피언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죠.
WBC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WBC는 정규 챔피언벨트 외에도 다이아몬드 벨트, 실버 벨트, 이터널 벨트 등으로 수여합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경중량급을 호령했던 두 천재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의 경기엔 다이아몬드 벨트가 걸려있었습니다. 메이웨더는 WBC에서 100만달러가 넘는 에메랄드 벨트를 받기도 했습니다. 무패로 은퇴한 챔피언이나 타이틀전에서 한 번도 지지않은 선수를 위한 이터널 벨트도 마련돼 있습니다. 메이웨더는 이같은 상황에 대해 “이제는 모든 선수가 챔피언이고, 벨트는 아마추어선수가 아마추어 트로피를 드는 것과 다를바 없다”며 “이제 복싱판은 정리가 필요하다. 정말 보기 좋지 않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세계복싱을 관장하는 최초의 메이저단체인 WBA가 생겨난 후 WBC, IBF, WBO 등이 시간을 두고 차례로 생겼습니다. 한 스포츠를 맡는 단체가 여럿인 것은 여러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대형 단체에 흡수되거나 사라지고, 수익을 위해 통합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미국프로풋볼의 경우 NFL의 대항마인 AFL이 생겨났다가 통합되고 메이저리그 역시 독립된 단체였던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복싱단체의 사정은 다릅니다. 예로 든 여러 스포츠가 리그 소속 팀들이 선수들과 계약을 맺어 월급을 주고 사람들을 끌어모아 돈을 버는 등 단체의 역할이 큰 반면 복싱단체는 별 다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WBA, WBC와 같은 복싱단체는 챔피언을 포함한 각 체급별 랭킹을 매기고, 규칙을 정합니다. 그리고 단체 이름을 걸고 열리는 경기에서 일정 부분 수수료를 받는 구조입니다. 선수들간 경기를 잡고 대전 조건을 협상하고 홍보하는 것은 프로모터와 선수측이 담당합니다. 즉 복싱단체들은 위엄과 권위를 팔고 돈을 챙길뿐이고 들어가는 비용은 별로 없다보니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것이죠.
여러 타이틀을 만드는 것도 역시 돈 때문입니다. 캐주얼팬들을 텔레비전, 유튜브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화려한 문구가 중요합니다. ‘미들급 2위와 3위의 대결’보다는 ‘미들급 잠정챔피언과 슈퍼챔피언의 대격돌’이 더 팔아먹기 좋은 구도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경기 흥행을 위해서 여러 챔피언 벨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단체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가만있는 선수에게 타이틀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WBC는 역대 미들급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로이존스주니어가 경기에 나서지 않자 부여하고 있던 타이틀을 박탈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흥행카드인 존스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자체적인 규칙을 어기고 다시 챔피언 자리에 앉혔습니다. 황당한 것은 존스가 벨트를 되찾은 시기가 이미 그라치아노 로치지아니가 존스의 부재를 틈타 타이틀을 얻은 뒤라는 것입니다. 로치지아니는 WBC를 고소했고 3000만달러를 받았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주요 타이틀을 모두 내건 경기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입니다. 우식이 퓨리를 꺾은게 대표적이죠. 우식은 주요 단체의 모든 타이틀을 얻었다는 뜻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undisputed)’ 챔피언으로 불립니다. 2008년 WBO가 메이저단체로 올라선 후 헤비급에선 처음으로 4단체 통합 챔피언이 된것이죠.
그러나 이같은 챔피언은 많지 않습니다. 유구한 복싱 역사를 살펴봐도 ’논쟁의 여지가 없이‘ 모든 주요 단체 타이틀을 석권한 선수는 19명(남 9명, 여 10명)뿐입니다. 왜냐하면 선수들간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경기를 치르지 않는 경우도 많고, 세분화된 체급을 오르내리며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죠. 2000년대 초중반 헤비급 왕자 레녹스 루이스의 시대를 끝낸 형제 챔피언 비탈리 클리츠코(우크라이나)와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는 ’형제끼리 싸우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때문에 결국 통합 승자를 가리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때 들여다보는 것이 복싱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체 ’링매거진(The ring)’입니다. 스스로를 ‘복싱의 성경’이라고 자처하는 링매거진은 1922년부터 ‘직계(lineal) 챔피언’을 뽑고 있습니다. 즉 모든 단체를 아울러 체급마다 줄세우기를 하는 것이지요. 직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원칙적으로 이전 직계 챔피언을 눌러야 합니다.
링매거진의 이런 시도는 최강이 궁금한 사람들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우식-퓨리’ 매치 역시 공식적으로 링매거진의 리니얼 챔피언매치로 소개됐지요. 그러나 일개 매체가 만들어낸 순위표엔 당연히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1970년대엔 역사적인 프로모터 돈 킹이 주관하는 복싱 대회의 흥행을 위해 링매거진이 자의적으로 무명선수의 순위를 올리는 것이 적발돼 공정성에 큰 손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또 1990년대 잠시 직계 챔피언을 내놓지 않다가 2002년부터 재개했는데, 이때 복싱판의 구도를 왜곡한 챔피언 명단을 내놔 복싱업계의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급기야는 2012년 새로운 직계 챔피언 결정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경우 체급 4~5위 선수간 경기도 챔피언 결정전으로 포장할 수 있도록 해 권위가 크게 실추됐습니다.
이에 복싱 저널리스트 및 기록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영리단체 다국적 복싱 순위 위원회 (Transnational Boxing Rankings Board)가 2012년 10월부터 발족해 자체적인 체급별 통합 순위를 제공하기 시작합니다. 현재는 TBRB에서 매기는 순위가 가장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엔 ‘셔독’ 등 종합격투기 매체들이 체급별 순위를 매겼지만 이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룹니다. UFC에서 공식적으로 내놓는 순위만 보아도 파악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UFC모델이 모든 측면에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경기를 잡고 파이트머니를 나누는 것이 선수와 프로모터의 몫인 복싱과 달리 UFC는 선수와 계약을 맺고 경기를 주선합니다. UFC 계약을 맺은 선수는 타단체 경기에 참여할 수 없지요. 복싱선수가 자영업자라면 UFC선수는 근로자격인 셈이죠.
이러다보니 UFC에선 선수들의 협상력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세계 최고의 무대, 리그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욋일을 하면서 경기를 뛰는 선수도 있습니다. 이때문에 헤비급의 프란시스 은가누는 UFC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연장 계약을 거절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타이틀이 난무하는 복싱판은 오히려 캐주얼팬들을 링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도 챔피언, 저기도 챔피언이라고 하니 판을 읽기 쉽지 않다는 것이죠.
지금과 같은 다양한 단체, 다양한 챔피언벨트는 당분간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돈이 걸려있는 문제니까요. 다만 복싱판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은 상황에서 적어도 ‘지구1짱’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담판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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