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론 감옥’ 탈출을 許하라[오승훈의 시론]

2024. 5. 3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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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논설위원
지도부 당론정치가 국회 좌우
의원은 거수기, 이탈하면 처벌
헌법·국회법 위 당헌 있는 모순
공천 통제·운동권 의식도 한몫
대의정치 무시·증오 정치 낳아
22대 국회, 자유투표 보장해야

지난 28일 제21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는 윤석열 대통령이 환부한 ‘채상병특검법’ 재의결을 놓고 벌어진 ‘수(數) 싸움’이었다. 법리나 타당성 논쟁이 아닌, 오로지 찬반의 머릿수 계산에 정신이 팔렸다. 결과는 이변 없이 가결 정족수에 17표가 모자란 부결, 폐기였다. 국민의힘의 선방이라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낭패를 본 것도 아니었다. 몇몇이 이탈한 듯하나 양 진영의 ‘당론’이 그대로 관철된 게 오히려 놀라웠다. 정당 소속 의원 숫자대로 표결되는 본회의, 법안의 문제점보다 당 방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상임위원회, 지도부의 의지대로 관철되는 ‘박수 의총’, 그래서 개별 의원의 의견보다 당론을 먼저 묻게 되는 언론.

이게 당론 정치가 만든 국회 풍경이다. 누구라도 탈주하면 처벌(또는 불이익)을 받는 ‘당론 감옥’이다. 헌법이 ‘양심에 따라 직무 수행하는’ 자율성을 보장한 헌법기관, 국회의원은 이 땅에 없다. 그 감옥 탈출을 도모한 적이 있기는 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9년 야당 한나라당은 당론을 어기고 노사정위원회법 처리에 협조한 이수인 의원, 동티모르 파병안에 찬성표를 던진 이미경 의원을 출당시켰다. 홍역을 앓고 나자 자성론이 일어 2002년 국회법이 개정됐다.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제114조 2항)는 자유투표(cross-voting) 조항이 신설됐다. ‘국회의원은 당의 거수기가 아니다’는 선언이었다.

그때뿐이었다. 2019년 말 민주당이 주도한 공수처 설치법안의 본회의 표결에서 금태섭 의원이 기권표를 던지자 당원들이 달려들었다. 당론에 따르지 않은 해당 행위라며 징계 청원을 했다. 당 윤리심판원은 제20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4일을 남겨놓고 경고 처분을 내렸다. 이미 공천 탈락이라는 불이익을 준 뒤였다. 근거는 당헌이었다. 당원에 대해 “당론과 당명에 따를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국가 통치의 규범인 헌법이나 국회 운영의 근간인 국회법보다 하위 규율인 정당 당헌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켰다.

모순의 근원은 헌법의 권력구조에 있다. 당론 정치는 의원내각제에선 필수적이다. 국회의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만큼 당론이 곧 정부 정책이고, 정치적 책임(의회 해산, 총선 실시)을 진다. 당 계파 간 조정에 따라 정해지는 당론의 구속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애매하게(절대 절묘하지 않게) 혼합돼 있다.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을 겸하지만, 국회를 해산할 권한은 없다. 그런데 내각제적 총리를 두고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을 허용해 분립과 견제의 경계가 흐릿하다. 대통령은 여당을 통해 국회를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국회는 대통령 견제를 가장 큰 책무로 인식한다. 여야 공히 공천권으로 의원들을 순치하고, 당론의 이름으로 자율을 제한하는 구도가 형성돼 버렸다. 정국 주도권 경쟁이 격화할수록, 여소야대 국회 구도에서는 더욱 당론 정치가 맹위를 떨친다.

여기에 우리만의 정치문화가 덧칠됐다. 일사불란한 내부 규율을 강조하는 전통적 조직관과 사회운동의 관성이 뭉쳐졌다. “민주화 운동을 규정했던 민주-반민주 구도의 유습은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결과 적대의 정치를 지배적으로 만들었다. 무조건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당과 대통령을 반대하는 야당이 극한의 적대와 갈등을 빚었다”(‘대통령의 권력과 선택’ 중) 증오의 정치가 기승을 부릴수록 당론 감옥의 경비는 더 삼엄해진다. 탈옥의 기미만 보여도 색출과 보복이 벌어진다.

제22대 국회에선 여야 간 당론 전쟁이 확전할 것이다. 다수 야당의 입법 폭주→소수 여당의 저지 실패→대통령 거부권의 악순환 고리마다 벌어질 일이다. 대통령제의 본산인 미국 의회도 양극화와 대치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여전히 자유투표가 보편적인 것은 우리와 다른 공천 과정, 비(非)통제적 정당문화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무너지지 않아서다. 이념과 노선이 달라도 토론과 숙의를 거쳐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그 결정에 대해선 선거를 통해 책임을 지는 게 의회 정치다. 당론 정치로 22대 국회도 망칠 텐가.

오승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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