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게 권하는 ‘저택 짓기’[살며 생각하며]

2024. 5. 3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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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원수에게 집 짓게 하라’는 건
재산 낭비시켜 자멸케 한 풍자
요즘 지역주택조합 파행으로
조합원 노력.재산 물거품 돼
좋은 집 욕망에 판단 흐려질 때
경각심 일깨우는 효과적 속담

최근 ‘명심보감’의 번역과 평설을 완성하였다. 널리 읽히는 초략본이 아니라, 그보다 3배나 많은 양을 가진 초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새로 번역하였다.

이 책에는 다른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은 속담이 많이 수록되어 번역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중에서 ‘들보와 두공의 단청이 마르지 않았건마는, 대청 앞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화梁공斗猶未乾 堂前不見癡心客·화량공두유미간, 당전불견치심객)’라는 속담은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들보는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질러 얹는 나무이고, 두공은 큰 규모의 목조 건물에서 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 올린 구조이다. 후대에 나온 ‘금병매’ 외에 다른 책에는 나오지도 않았고, 앞뒤 맥락이 없는 이 구절만으로는 속뜻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숙고 끝에 알아낸 뜻은 이렇다. 부(富)를 과시하며 들보와 두공에 채색을 화려하게 하여 거창한 저택을 지었으나, 준공을 보기도 전에 주인은 죽고 말았다. 보람도 없이 쓸데없는 곳에 큰돈을 낭비했으니 그 주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건축에는 저와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사치의 극점에는 건축이 있다. 큰 부를 얻은 사람이 온갖 사치를 부리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주택과 별장, 정원에 손을 뻗는다. 그런데 큰 부는 대체로 나이가 들어서 손에 쥐고, 건축은 비용이 크게 들고, 완성해 손에 넣기까지 긴 세월이 필요하다. 욕심을 내어 큰 비용과 노력을 쏟았으나 결과물의 완성을 보지 못하여 그 보상을 받지 못하기 쉽다. 저 속담은 집 사치의 작은 비극을 비꼬았을 것이다. 나이 들어 거창한 주택을 지으면 저는 못 누리고 남 좋은 일만 할 뿐이라는 경계를 담고 있다.

서울의 강남구에 있었던 압구정에는 ‘명심보감’의 속담에 꼭 들어맞는 사연이 남아 있다. 압구정은 한명회 이후 정계의 유력자가 번갈아 소유하였다. 숙종 때 왕실의 유력자이던 진평군(晉平君) 이택(李澤)이 큰돈을 주고 사들여 3000냥이란 거금을 들여 여러 해 걸려 건물을 거창하게 신축하였다. 진평군은 고작 몇 번 다녀갔으나 끝내 완성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사람들은 밤에 촛불을 들고 한 번 들른 것과 차이가 없다고 수군거렸다. 거금을 들여 압구정을 매입하고 신축하였으나 번듯하게 누리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 위 속담의 ‘어리석은 사람’에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 속담은 우리의 고려 말기에 해당하는 원나라 말기에 유행했다. 우연히 원나라 학자 공극제(孔克齊)의 ‘지정직기(至正直記)’란 책을 보았더니 화려한 주택과 구하기 힘든 명품을 얻으려 하지 말라면서 다음과 같은 속담을 인용하였다. ‘남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에게 집을 지으라고 종용하고, 남을 의롭지 않게 여기면 그에게 명품을 사라고 권유하라.’ 어떤 사람이 근사한 저택 때문에 소송 사건에 끊임없이 휘말리다가 결국에는 재산을 탕진한 사건을 직접 보았다면서 유행하는 속담을 인용하였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내 손으로 직접 분풀이하지 말고 저 스스로 망하게 하는 방법으로 거창한 주택을 짓고, 값비싼 명품을 지나치게 좋아하도록 하는 방법을 추천하였다. 두 가지를 탐닉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재산을 탕진하게 되니 손을 대지 않고 코 푸는 방법으로 소개하였다.

원나라 속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기는 하지만 서로 관련이 깊다. 화려한 저택을 짓는 사람은 보람도 없이 헛돈만 쓰기 쉽다. 그러니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원수 같은 사람에게 재산을 탕진하도록 저택을 지으라고 꼬드기고 부추기면 저절로 원수를 갚을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속담이 나온 것은 원나라 때 저택을 짓는 과정이나 짓고 난 뒤에 큰 곤경에 처한 일이 많은 사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원나라 때에만 고정될 수는 없다. 이후에도 이 속담은 널리 사용되었다. 명나라의 요순목(姚舜牧)은 ‘약언(藥言)’이란 잠언집에서 주택에 부서진 곳이 있으면 수리하여 살아도 충분한데 멀쩡한 집을 부수고 새로 짓느라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면서, 당시에 널리 퍼진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는 집을 지으라고 권하라(與人不睦 勸人造屋·여인불목 권인조옥)’라는 속담을 기록해 놓았다. ‘지정직기’에 나온 속담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실상은 뜻이 비슷한 속담이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이 이 속담을 인용해 집을 짓느라고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풍자하였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비슷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찾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비슷한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역주택조합은 원수에게나 권하라는 말이다. 지역주택조합이 장점이 있는 제도임에도 온갖 불법과 파행으로 진행되어 아파트를 장만하려는 조합원의 아까운 재산과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속담에도 비유가 흥미롭고, 말투가 재치 있는 것이 많이 전해온다. 하지만 대체로 직설적 화법이 우세하여 부동산 투자를 원수에게 권하라는 말은 우리 속담에서는 상당히 낯설다. 귀가 솔깃한 훌륭한 제안을 하여 원수에게도 뭔가 호의를 베푸는 시늉을 하지만, 사실은 술수에 능한 의뭉스러운 짓이다. 요사이는 원수에게 권하는 부동산 투자의 목록이 기획부동산이나 상가투자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냉정한 판단을 방해하여 피해를 보는 이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부동산 투자를 조심하라고 당부할 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말이 없다. 원나라 때 유행한 속담이 21세기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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