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포르투갈 상인, 일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다
16세기, 동방무역의 주도권을 쥔 포르투갈
1492년 스페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린 지 6년이 지난 1498년,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항로를 발견하면서 인도 서부 고아를 점령하고 중국과 인도양을 잇는 말레카항 장악, 향신료 산지 인도네시아 자바섬 진출 그리고 중국 마카오에 전초기지 구축, 일본 진출 등 16세기 전반에 걸쳐 동방무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 경쟁자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진출과 식민지화에 전념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에 한 발 뒤쳐졌다.
특히 일본에 먼저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예수회 소속 카톨릭 선교사들, 심지어 중국 해적들과도 암암리에 손잡고 무기상과 노예무역상으로 활동하면서 최신 무기인 조총과 탄환 원료 납, 화약 원료 초석을 제공하며 일본이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세계 최대 조총 보유국, 일본
포르투갈의 안토니오 갈바오가 쓴 ‘신구세계발견기’에 따르면, 1542년 한 척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표류 끝에 일본 가고시마의 남쪽 섬 다네가시마(種子島)로 떠내려 왔는데 거기에는 세 명의 포르투갈인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맞이한 섬의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다카(種子島時 )는 포르투갈인들이 들고 있는 괴상하게 생긴 쇠막대를 보자 “그 쇠막대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포르투갈인은 그 물건을 들고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이 하늘을 울리며 표적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위력과 소리에 감탄한 토키다카는 그것을 비싼 값에 2정을 구입했다.
조총을 손에 넣은 토키다카는 총과 화약 제작에 나서 3년 만에 복제에 성공했다. 그러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군사적 상품적 가치에 주목한 사카이(堺, 현 오사카) 등지에서 다네가시마를 찾아와 총을 구입하고 제조 비법을 전수받고 돌아갔다. 각지에서 총기 제작에 나서 조총은 고가에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특히 당시 일본의 중심지였던 오사카 일대에서 대규모 생산이 이뤄졌다.
전국을 제패하기 전, 일개 다이묘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조총 500정을 발주하고 심복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전 이름)에게 총기 생산을 장려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그의 군대는 일본 최대의 조총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를 일본 제1인자의 위상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디딤돌이 된다. 50년 후 임진왜란 즈음에는 일본의 조총 보유가 50만정에 이르게 되어 일본은 세계 최대 조총 보유국,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떠오른다. 다네가시마에 조총이 전래된 지 50년 후, 조선은 이것들로 무장한 도요토미 군대의 침공(임진왜란)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다.
영지를 로마교황청에 헌납한 나가사키의 키리스탄 다이묘
1549년 일본에 온 첫 번째 카톨릭 선교사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난반지(南 寺,교회당), 코레지오(선교사 양성소), 세미나리오(신학교)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포교에 나서면서 카톨릭 신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숫자는 포교 개시 50여년 만인 에도막부시대 초기 1605년경 당시 일본 인구 1200만 명 가운데 무려 75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서 카톨릭 신자가 증가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최대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카톨릭에 대한 관용과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천하 재패에 장애가 되는 기득권 세력 불교계에 대한 견제 심리와 규슈지역에 세력을 구축한 카톨릭 개종 다이묘들을 우호세력으로 삼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영주를 키리시탄 다이묘(大名)라고 부르는데 규슈 나가사키항을 개항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총과 화약 등 최신 무기를 제공받는 대신에 카톨릭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키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자기 영지의 백성들에게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불교나 신사 승려를 살해했다. 조상의 묘를 파헤치고 개종에 응하지 않는 백성들을 해외에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무기를 제공받는 대가였던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자기의 영지를 로마 교황청에 헌납하기까지 했다. 이점에서 나가사키는 일본 최초의 외국 식민도시였던 셈이다.
분고(豊後, 현재 오이타현)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자신의 숙적을 격퇴하기 위해 예수회로부터 화약 원료 초석을 공급받고 개종을 했다.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는 자기 영지 내의 미혼 소년 소녀들을 잡아다 노예로 헌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해외로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가 무려 5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들은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 의해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아메리카대륙 등지로 팔려나갔다. 이를 보다 못한 어느 포르투갈 선교사가 자국의 돈 세바스찬 국왕에게 그 참혹상을 알려 1571년 ‘일본인 노예 구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근절되지는 않았다.
카톨릭 선교사들의 일본공략 구상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카톨릭 선교사 해외파견을 통해 식민지의 카톨릭화 작업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 선교사들은 식민지 작업의 첨병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에서 그들의 역할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공략에 관해서 예수회 동인도관구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야노는 스페인 필리핀 총독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일본 국민들은 매우 용맹한데다 오랜 동안 전투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정복은 불가능하다’며 군사력으로의 정복은 어렵지만 일본 내의 카톨릭 개종 다이묘들을 우군으로 삼는다면 이들이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로드리고 베베로 전 스페인 필리핀총독은 ‘일본에 대한 무력 침공은 불가능하지만 먼저 일본인들을 기독교화를 시켜서 일본인 카톨릭 신도들에 의한 정권 전복을 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그의 글 ‘일본견문록’에서 주장했다. 일본에 파견된 예수회와 프란시스코회 소속 선교사들의 여러 보고서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에 대한 직접 공략보다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키리시탄 다이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는 의견으로 귀결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 선봉장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세례명 아우구스티누스인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선교사들은 어느 사이에 적지 않은 다이묘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켜 놓고 있었다. 일본에 카톨릭이 일본에 전래된 지 50여년 만에 카톨릭 선교사들이 키리시탄 다이묘를 동원하여 일본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정권 전복 위기를 감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川家康)는 선교사 처형과 추방 조치 그리고 나가사키 일대에서 일어난 카톨릭 신자들의 봉기(시마바라의 난) 진압 등 카톨릭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구상은 좌절되고 그 이후 일본은 260여 년에 걸친 ‘쇄국’의 길을 걷게 된다.
*다음 회에서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川家康)가 사랑한 조선 여인’을 소개하여 올리고자 한다.
장준영 프로필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과정(에도시대 문학전공)수료
일본 교도통신사 서울지국기자
한국항공대 초빙교수
칼럼니스트, 헤럴드 고문(현)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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