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바닥에 갈라진 틈이…양자컴 '큐비트' 예술이 되다
“실험실 바닥에 틈이 있다는 게 신기해요.”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 위치한 연구협력관에 방문한 한 관람객의 반응이다. 이 건물은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이 실험하는 공간이다. 양자 연구를 위해 설계됐기 때문에 일반건물과 구조가 다르다. 실험 장비가 놓인 공간은 건물의 나머지 공간과 틈을 두고 떨어져 있다. 발소리와 같은 소음이나 진동이 장비에 전달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만큼 주변 환경에 예민한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연구단은 28일 실험실과 장비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양자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도 선보였다. 연구단 차원에서 실험실과 장비를 적극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낯설고 어려운 학문이지만 양자컴퓨터·양자통신 등 점차 중요도가 커지고 자주 접하게 될 미래기술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과학 대중화’ 관점에서 양자역학은 어느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 양자컴 기본단위 ‘전자스핀 큐비트 플랫폼’ 개발 장비 눈으로 보다
연구단은 양자컴퓨터의 기본단위 '큐비트'를 연구한다. 기존 컴퓨터가 쓰는 0과 1이 ‘중첩’되고 ‘얽힘’이 일어나는 큐비트는 많은 양의 정보를 동시에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연구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큐비트를 탄생시켰다. 원자 스핀으로 큐비트를 만드는 ‘전자스핀 큐비트 플랫폼’을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메모리를 구현한 연구 결과를 지난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독자적으로 큐비트 플랫폼을 개발한 데는 주사터널링현미경(STM) 장비가 핵심 역할을 했다. STM에 달린 원자 크기의 탐침이 원자 수준에서 이미지를 얻고 원자를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다. 연구팀은 STM에 전자스핀공명이라는 방법을 접목해 전자스핀을 제어하고 원하는 모양으로 원자를 배열해 큐비트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STM과 같은 초정밀 실험 장비를 다루려면 주의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장비 내부에 손가락이 닿거나 외부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실험 성패가 엇갈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연구단은 폐쇄적인 환경을 유지할 것 같지만 오히려 대중에게 공간을 오픈했다.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연구단장은 “양자 분야는 굉장히 전문적이고 어렵지만 비전문가인 대중에게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연구단이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납세자인 국민에게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미래 과학자들이 탄생하길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 양자는 어렵고 따분? 진입장벽 낮추는 ‘과학 대중화’ 시도
연구단은 과학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 대상 특강과 탐방 기회 등을 제공해왔다.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전국 중학교에 무료 배포한 공을 인정받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선희 대외협력팀장은 “중학교 프로그램은 차세대 과학자 양성을 위한 뜻이 담겨 있고 실험실 공개는 양자역학이라는 기초과학이 얼마나 잠재력 높은 학문인지 알리는 매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이 이공계 기피와 맞물리면서 과학과 대중을 잇는 활동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게 연구단의 진단이다. 과학은 어렵고 재미없는 학문이라는 선입이 이공계 진학의 거대 장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구단이 3회째 진행 중인 미술공모전은 예술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과학 장벽을 낮추고 있다. 올해 ‘큐비트 전달자’라는 작품으로 공모전 1위를 수상한 이나연 작가는 “양자역학은 생소한 주제지만 좋은 스토리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입자와 파동이 관측하는 순간 하나로 확정되는 양자 개념을 섭씨 35도가 넘으면 한 가지 색으로 확정되는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의 작품 옆에는 헤어드라이어가 놓여 있다. 감온안료를 사용한 작품에 헤어드라이어로 열을 가하면 색이 변한다. 현장에서 직접 열을 가해본 한 관람자는 “큐비트에 대한 친숙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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