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개혁·반도체법·방폐장…‘식물정치’에 짓눌린 대한민국

박나영 기자 2024. 5. 3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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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으로 시작한 22대 국회…‘거부권과 탄핵의 일상화’ 우려
巨野 특검법 총공세에 尹 릴레이 거부권…‘정치가 실종’된다

(시사저널=박나영 기자)

'36.6%.' 21대 국회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였다. 역대 가장 많은 법안이 발의됐지만, 가장 낮은 법안 처리율을 기록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발의한 법안 건수는 2만5855건으로 역대 가장 많았지만 이 가운데 9467건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 처리율은 5월28일 기준 36.6%로 역대 최저치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3건 중 1건꼴로 통과됐는데, 법안 하나가 처리되는 데 평균 599일, 1년8개월이 걸렸다. 국민이 뽑은 국회 일꾼들이 4년 내내 반목과 대립으로 시간을 허비했을 뿐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다.

21대 국회에서 국민의 시선이 향해 있던 민생법안들은 여야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철저히 외면당했다.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먼저 거야(巨野)가 쟁점 법안을 합의 대신 일방 처리한다. 그러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한다. 정국은 더욱 얼어붙고 다시 야권은 대통령을 정면 겨냥한 각종 특검법 공세를 펼친다. 협치는 그렇게 사라졌고, 1만6784건의 법안도 결국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2대 국회 개원일인 5월30일 국회 본청에 개원을 축하하는 걸개그림이 크게 걸려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21대 국회, 법안 1건 통과에 평균 599일 걸려

문제는 대한민국의 내일이 달려있는 법안들이 그렇게 사장됐고 미래세대의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는 점이다. 끝내 무산된 연금 개혁이 대표적이다.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았던 민생·경제 법안들도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 묻혀버렸다. 사용후 핵연료 저장을 위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미래 먹거리인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을 위한 근거가 담긴 'AI 기본법'과 반도체 등 투자액 세액 공제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K칩스법' 등이 대표적이다. 악덕 부모의 자녀 재산 상속을 막는 '구하라법', 법관 증원으로 재판 지연을 해소하기 위한 법안, 세계 최악의 저출생 극복을 위해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법안 등도 결국 좌초됐다.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은 22대 국회에서 다시 처음부터 처리 절차를 밟아야 한다. 논의부터 여야 합의까지 다시 시작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수개월이 더 걸린다.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행태가 22대 국회에서는 더 악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는 데 있다. 여소야대 구도는 22대 국회에서 한층 더 가팔라졌고, 대화와 타협보다 대결과 충돌을 앞세우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거대 양당은 강성 지지층에 한층 더 갇힌 모습이다. 이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야권의 대통령 탄핵 운운이 '일상화'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전문가들은 결실 없는 정치가 반복된다면 그 피해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부터 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에서 이탈표를 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국민 대다수가 채 상병 특검법이 통과되길 바랐는데, 부결로 끝난 것에 대해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5월29일 CBS라디오 인터뷰)

21대 국회는 마지막 날까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허망한 장면들만 연출했다. 민주당은 5월28일 국민의힘의 반발 속에 마지막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고 여야 간 의사일정 합의가 되지 않은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 안건과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처리 안건 등을 표결에 부쳤다. 채 상병 특검법은 윤석열 대통령이 '10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 3명 중 2명이 찬성 의견을 낸 법안이기에 민심을 거스른 거부권 행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재표결에서 여야 원내지도부가 각각 총동원령을 내려 맞붙은 결과 여당의 뜻대로 최종 폐기됐다. 찬성 179명, 반대 111명, 무효 4명이라는 무기명 투표 결과는 21대 국회 여야의 의석수 분포와 대체로 일치했지만 여야는 각자의 유불리에 따라 이탈표 계산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재투표 결과와 협치 실종에 따른 상처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게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5월29일까지도 거대 야당이 밀어붙인 쟁점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졌다. 야당은 전날 본회의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등 5개 쟁점법안을 단독으로 의결해 정부에 넘겼다. 이에 반발하며 본회의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5개 법안 중 세월호피해지원특별법을 제외한 전세사기특별법, 민주유공자예우관련법 제정안, 지속가능한한우산업지원법 제정안,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등 4개 법안에 대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했고, 윤 대통령은 해당 4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통상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재의결을 거치지만 이날 국회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해당 4건은 자동 폐기됐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취임 이후 이번이 7번째이고, 법안 개수는 14건으로 늘어났다.

여야가 특검법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애꿎은 민생 법안들이 희생됐다. 'AI 기본법'과 'K칩스법' 등이 발이 묶였다. 'K칩스법'은 올해 말이 일몰 기한이라 한시가 급했지만 21대 국회는 이를 외면했다. '모성보호 3법'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법 등은 여야 공감대가 형성됐으나 여야 대치 속에 관련 상임위 회의가 열리지 못하면서 폐기됐다. '구하라법'도 앞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를 통과해 전체 회의에 상정됐지만 회의 일정을 잡지 못했다. 자동 폐기로 22대 국회로 넘어간다 해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고 여야 합의도 불투명해진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5월28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그 뒤로 야당 의원들이 해병대원 특검법 재표결 찬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與 사법 리스크 공세에 野는 탄핵열차로 맞불

22대 국회에서도 국민의 피를 말리는 식물정치는 이어질 전망이다. 거대 야당이 완력으로 여당을 배제한 채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무력화하는 정치 구조가 무한 반복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에서 이탈표를 최소화하는 데 사활을 걸었던 국민의힘은 이번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거야의 입법 강행 드라이브에 소수 여당의 한계는 더욱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22대 국회가 열리면 사상 최악의 국회, 난장판 국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22대 국회에서는 야당이 192석, 여당이 108석으로 21대에 비해 여당 의석수가 더 줄어든다. 국민의힘이 단일대오를 유지한들 야당의 줄특검 공세에 대응할 여력이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당에서 8석만 이탈해도 대통령 거부권은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의힘 김재섭·한지아 의원 등이 채 상병 특검법에 찬성 의사를 밝히면서, 당내 비주류·쇄신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주당은 4개 쟁점법안과 채 상병 특검법을 비롯한 각종 특검법 등 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을 22대 국회에서 반드시 재입법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쌍특검법'으로 불린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의혹·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별검사법, 방송 3법,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간호법 개정안 등이 포함된다. 21대 마지막 본회의에서 상정이 불발된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가맹사업법 개정안,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개정안 등도 재추진 대상이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윤 대통령 탄핵소추에도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대통령실의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탄핵소추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이 사건 피의자가 될 수 있는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만으로도 탄핵소추 사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5월2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처음으로 공개 언급했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윤 대통령을 겨냥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왜 탄핵됐나"라며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그럼 특권 거부권을 행사하는 자는 더 큰 범인인가"라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이 자신과 김건희 여사를 향한 야당의 공세를 한사코 막는 근저에는 자신이 특검 수사 선상에 오르고,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법적 두려움이 깔려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대로 이재명 대표는 거대 야당 대표로 대통령 탄핵 추진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에서 조속히 벗어나려 한다는 의혹을 받는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특검법이 가결되면 야당은 곧바로 탄핵열차에 시동을 걸 것"이라며 "특검법은 민주당이 만들고, 민주당이 수사하는, 민주당을 위한 악법으로, 속내는 국정을 흔들고 탄핵을 추진하며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강성 지지층에 포위된 무력화된 정치가 민주주의마저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최근의 정치는 법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흔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22대 국회에서도 이 같은 행태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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