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윤정의 식물 이야기] 꽃 중의 왕 모란, 그 왕을 모시는 작약
모란의 꽃잎은 몇 장일까. 모란꽃은 단 몇 장의 꽃잎이 우아하게 펼쳐진 것에서부터 수 백 장의 꽃잎이 거대한 꽃송이를 이루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식물학자들조차 모란꽃의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한다. 붉고 거대한 꽃에서부터 우리는 모란에 압도당한다. 모란이 가진 카리스마, 아니 권력이다.
식물 분류에서 꽃잎 수는 계통을 나누는 주요한 기준 중 하나다. 장미과 식물은 5장의 꽃잎을 갖는다. 사과나무, 벚나무, 배나무, 장미, 찔레, 조팝나무, 모두 장미과 식물로 똑같은 모양의 꽃잎이 5개의 낱장으로 분리된다. 십자화과 식물은 말 그대로 4장의 꽃잎이 주요 특징이다. 배추, 무, 유채, 콜리플라워, 브로콜리, 모두 4장의 꽃잎이 십자로 반듯하게 배열되어 있다.
모란은 3~7개의 꽃받침과 보통은 5~8개이지만, 때로 13개까지의 꽃잎이 원래의 꽃을 구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한 원종의 꽃잎 수는 모른 채, 수 천 년 동안 자연적인 돌연변이와 인간의 개입에 의해 모란꽃은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향기롭게 개량되었다.
꽃은 수술을 꽃잎으로 변형시키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갖는다. 흔히 모란꽃을 부르는 방식은 싱글, 더블, 그리고 세미더블 3가지로 정리된다. 싱글은 원래의 꽃잎이 1~3개의 층을 이루며, 노란 수술다발과 씨방을 품은 암술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술이 거의 꽃잎으로 변형되어 수 백 개의 꽃잎을 이루는 더블은 수술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절반 정도의 수술이 변형된 것은 세미더블이다. 원래 더블의 의미는 수술과 암술이 변형되는 과정에서 꽃 속에 꽃이 피는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바깥쪽에 위치하는 원래의 꽃잎은 넓게 펼쳐지고, 수술이 변형된 꽃잎은 안쪽으로 갈수록 커져 꽃의 중앙이 높아진다. 때로 안쪽의 변형된 꽃잎이 원래의 꽃잎과 완전 다른 모양을 지녀, 말 그대로 2중의 꽃잎 모양으로 3차원의 구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진정, 최면, 항균에 좋은 약 성분
모란Paeonia suffruticosa은 중국 원산의 낙엽성 활엽관목으로 작약과 작약속 식물이다. 우리나라에는 1,500여 년 전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했다. 모란은 나무이기에 겨울 동안 지상에 줄기가 남아 있으며, 묵은 가지 끝에서 뿌옇고 희끗한 새 가지를 피운다.
모란과 짝을 이루는 작약芍藥(P. lactiflora)은 나무인 모란과 달리 여러해살이풀로서 매년 뿌리에서 새로운 줄기가 나온다. 작약 역시 우리나라로 들여온 재배종으로 여겨지며, 자생종 작약인 백작약은 산지 곳곳에서 드물게 발견된다.
모란은 한자명인 목단牧丹이 순화되어 모란으로 변했지만, 작약은 중국 한자명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종종 작약을 함박꽃이라 표기하기도 했는데, 야생의 백작약은 잎이나 꽃의 모양이 재배종 작약과는 확연히 구분되며, 언뜻 목련속 식물인 함박꽃나무의 꽃과 닮아 있다. 작약의 작芍이 바로 '활짝 핀, 함박'의 뜻이니 작약은 곧 '꽃이 함박 피어나는 약용식물' 쯤 되겠다. 꽃의 아름다움보다 약의 가치가 강조된 듯하다.
세계적으로 모란보다 재배의 역사가 긴 식물은 드물 것이다. 모란은 약 3,900년 전부터 중국에서 약용식물로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에서도 모란이나 작약이 약용으로 재배되고 있었으나 중국으로부터 아시아 원산의 모란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그리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과 시베리아 지역 원산의 모란이 서구로 도입된 것은 1784년이었으며, 이후 프랑스나 영국에서 동양과 서양의 모란과 작약을 상호교배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모란과 작약을 약용식물뿐 아니라 관상용 식물로 키워왔는데, 16세기에는 독특하고 복잡한 향기를 피우는 30여 종 이상의 작약 품종이 만들어졌다.
모란의 속명 파에오니아Paeonia는 그리스 신화에서 약초로 신들을 치료해 주는 의술의 신 파에온Paeon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용식물로서 모란의 재배 역사를 돌이켜보면 달리 어떤 학명이 필요할까.
모란이나 작약 뿌리에는 파에오니플로린paeoniflorin, 파에오닌paeonin, 파에오놀paeonol 등 다양한 약성분이 풍부하다. 이 성분들은 진정과 최면, 항균, 혈관 및 혈액 등과 관련된 위중한 병에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약성이 강하니 함부로 먹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귀한 약용식물로 재배하긴 했지만 모란이나 작약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역시 놓치지 않고 이름에 붙였으니, 곧 꽃에 대한 예우인 붉을 단丹과 함박 작芍이다.
모란이나 작약의 꽃봉오리에는 개미들이 몰려든다. 꽃봉오리를 덮고 있는 녹색의 꽃받침은 끈적이는 꿀을 분비하는데, 이 꿀 속에는 개미의 먹이가 되는 다양한 유기 화합물이 존재한다. 개미를 쫓기 위해 손가락으로 꽃봉오리를 튕기면, 그 단단함에 손끝이 아프다.
비록 개미가 모란이나 작약의 꽃가루를 전달해 주는 수분매개자는 아닐지라도, 꽃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애벌레는 물리친다고 여겨진다. 개미는 일시적으로만 꽃봉오리에 머물기에 아무런 해는 끼치는 않는다. 꽃이 피어나면 개미들은 다른 먹이를 찾아 모란을 떠난다.
개미는 떠나지만 그 흔적은 모란이나 작약의 잎에 흉하게 남는다. 꿀과 개미의 배설물은 특정한 곰팡이균의 먹이가 된다. 하얀 가루가 잎을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흰가루병과 마치 검은 재가 잎에 내려앉은 듯 번지는 그을음병은 바로 이런 꿀과 개미배설물을 먹고 자라는 곰팡이균들이 발생시킨다.
비록 흰가루병이나 그을음병 자체가 식물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햇빛을 가려 광합성을 저해하거나 미관을 해치기에 정원사를 곤란하게 만든다. 꽃이 지면 찾아오는 습하고 더운 계절과 맞물려 곰팡이의 증식이 빨라지면, 거의 모든 잎들이 흰색이나 검은색 곰팡이로 뒤덮인다.
관상용 모란의 증식은 주로 작약과의 접붙이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접붙이기란 원하는 성상의 식물을 바탕이 되는 다른 식물의 뿌리나 줄기에 붙이는 방법을 이른다. 모란은 작약에 비해 재배하기 쉽지 않다. 뿌리가 깊게 들지 않지만, 물빠짐이 좋아야 하고 뿌리의 정착이나 생장 적응이 까다롭다.
하지만 성장과 증식이 빠른 작약 뿌리에 접붙이기한 모란은 짧은 시간 내 풍성한 형태를 만들고, 일찍 꽃을 피운다. 최근의 모란 모종은 대부분 작약 뿌리를 가지고 있다. 종종 작약 뿌리로부터 성장세가 좋은 작약 줄기가 모란과 함께 나오기도 하는데, 모란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작약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아까워서 주저하면 작약의 기세에 모란이 자라지 못하고 끝내 작약이 되는 수가 있다. 꽃 감상이 목적이라면 작약 역시 충분히 기쁨을 주기도 한다.
대세는 작약, 지존은 모란
모란과 작약은 서늘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이다. 많은 품종이 영하 10℃에 이르는 낮은 온도에서도 살아남는다. 봄에 새로운 성장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겨울 추위가 필요하다. 모란을 가꾸는 정원사에게 차가운 겨울 추위는 오히려 축복이다.
중국에서 모란은 꽃 중의 왕, '화왕花王'이라 하고, 작약을 꽃의 재상, '화상花相'이라 하며 최고의 격식을 부여했다. 모란의 꽃말은 당연하게도 '부귀와 영화, 품격'을 상징한다. 나무로서 100년 이상 생존하는 모란의 생명성 역시 귀한 품격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모란은 400년경에 중국 낙양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 귀족들의 시, 그림, 의상, 휘장, 장식 등에서 고귀하게 표현되던 모란. 그러나 고급 공단 대신 나일론 이불에 크고 화려하게 인쇄되어 있던 모란 문양이 낡고 빛바래 찢겨져 나갈 때의 그 하찮음, 부귀와 영화란 그런 것일까.
반면 작약의 꽃말은 다소 감성적이다. 향기로운 작약 꽃을 보내 서로간의 정을 두텁게 한다는 '작약지증勺藥之贈'은 5월의 신부들에게 로맨틱한 의미를 주어, 전통적인 5월의 꽃인 장미를 제치고 더 많은 선택을 받고 있다. 혼례복에 새겨진 모란의 세대교체쯤 되는지 모른다. 작약의 약藥이 다짐의 약約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세계 원예시장에서 모란보다는 작약이 대세를 이루며 다양한 품종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시대가 변해 작약이 더 보편적인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지존이란 세대의 벽을 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모란, 그 붉은 꽃은 여전히 사람들의 고귀한 품성을 향한 단심丹心을 상기시키는 교훈이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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