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스레브레니차 대량학살'과 비극의 정치화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유엔 총회는 7월 11일을 '스레브레니차 대량 학살에 대한 국제 반성과 추모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지난 23일(현지시간) 채택했다.
스레브레니차 대량 학살은 옛 유고연방 내전이 진행중이던 1995년 7월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 동부 스레브레니차에서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무슬림 남성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최소 8천372명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대량 학살이다.
2014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V)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판결했고 2007년 국제사법재판소(ICJ)도 같은 판결을 했지만, 세르비아는 여태껏 학살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번 결의 추진에 대한 세르비아의 반발은 거셌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결의안 표결이 진행되는 동안 세르비아 국기로 몸을 감쌌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나는 세르비아가 자랑스럽다"고 적었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유엔 총회 생중계를 지켜본 정부 관계자들도 국기를 몸에 둘렀다.
이번 결의에는 세르비아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르완다와 함께 결의안을 작성한 독일의 주유엔 대사인 안체 렌더체는 "이번 결의안은 유엔의 소중한 회원국인 세르비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대량 학살의 가해자를 겨냥한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 결의가 모든 세르비아인을 학살범으로 낙인찍고 막대한 배상금 소송을 불러올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친정부 언론들도 이번 결의를 세르비아 국민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으로 묘사했다.
그 결과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세르비아계 주민 집단 거주지인 코소보 북부 미트로비차에선 세르비아 국기를 꽂은 차량 행렬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유엔 총회 표결 몇 시간 전, 세르비아 전역에는 부결을 기원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르비아의 고층 빌딩에는 "우리는 대량학살 국가가 아니다"라는 대형 글귀가 걸렸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스릅스카공화국(RS)의 밀로라드 도디크 대통령은 유엔 결의안이 보스니아의 무슬림계에 의해 강요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를 분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레브레니차 대량학살이 벌어진 지 29년이 흘렀지만,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상처가 아물려면 현재의 정치가 중요하지만, 세르비아 대통령은 화해의 의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결의를 민족주의 선동과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를 되살리는 수단으로 삼으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한다. 비극을 정치화한 것이다. 실제로 각종 외신에서는 부치치 대통령의 반발을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둔 계산된 정치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유엔 총회 결의는 과거의 잔혹 행위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효과가 있지만 구속력은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과 같은 강제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결의의 성공 여부는 역사적 진실 인정과 반성, 화해, 재발 방지 약속에 달려 있다.
그런 측면에서 결의안이 당사자인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합의 없이 유엔 총회에 일방적으로 상정됐다는 점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세르비아는 2010년만 해도 스레브레니차 대량학살에 대해 의회 차원에서 사과했다. 2015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부치치가 스레브레니차의 학살 희생자 묘지를 찾아 헌화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세르비아는 학살 범죄를 인정하지는 않을지언정 적어도 화해의 의지를 보여줬다. 세르비아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EU가 국제 분쟁 해결을 가입의 선행 조건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EU 가입이 지연되면서 뜨거웠던 국내 EU 가입 지지여론은 차갑게 식어갔고, 세르비아 정부는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 방문에서 드러나듯 러시아, 중국과의 밀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은 이번 결의를 계기로 누가 세르비아의 진정한 친구인지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반대표를 던진 국가는 EU 등 서방이 경계하는 러시아, 중국 등이었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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