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왜 ‘그녀’인가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한겨레 2024. 5. 3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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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Her) 스틸컷.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이제 인공지능은 우리의 ‘그녀’가 되었는가. 오픈에이아이(OpenAI)에서 이미지나 음성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 ‘지피티-포오’(GPT-4o)를 발표하자, 이것을 2013년 영화 ‘그녀’(Her)가 마침내 현실이 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혼을 앞둔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가 여성 목소리를 내는 컴퓨터 운영체제 ‘사만다’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깊은 관계에 빠진다는 영화 속 설정을 우리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이 새 서비스 발표 무렵 ‘그녀’를 언급한 것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했다.

새 인공지능 서비스가 영화 ‘그녀’를 모델로 삼은 것에 대한 반응이 활발하다. 영화의 결말을 기억하는 이들은 주인공이 사만다가 자기 말고도 수많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을 떠올린다. 인공지능과 맺는 관계가 행복하게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조금 더 심각한 문제는 ‘그녀’에서 사만다 목소리를 담당한 배우 스칼릿 조핸슨이 제기했다. 올트먼이 새 인공지능에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조핸슨이 거절했지만 결국 그와 상당히 유사한 목소리가 동의 없이 탑재됐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영화 ‘그녀’를 인공지능의 목적지로 삼았던 것이다.

영화 ‘그녀’가 현실이 될 정도로 인공지능이 발전했는지 판단할 자격은 내게 없다. 하지만 과연 영화 ‘그녀’가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논하는 데 적절한지 물을 수는 있다. ‘그녀’를 인공지능 연구의 지향이나 척도로 삼을 때 우리는 무엇에 환호하면서 무엇을 외면하는가. ‘그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인간을 닮은 존재와 언제, 어떻게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상상할 수는 없는가.

2015년 개봉한 일본 영화 ‘사요나라’는 ‘그녀’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과 인간을 닮은 존재의 관계를 보여준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난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세계는 황폐해지고, 정부의 조치에 따라 모두 떠나는 가운데 외국인인 주인공은 끝까지 대피명단에 오르지 못하고 남겨졌다. 방사선 노출로 피폐해지는 주인공을 돌봐줄 사람도, 고통을 나눌 사람도 모두 사라졌다. 홀로 죽음을 맞게 된 주인공의 곁을 지키는 것은 인간을 똑 닮은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무너지는 세계에 홀로 남은 인간은 일도 도와주고 시도 읊어주는 로봇과 그야말로 죽음까지 함께하는 관계를 맺는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격한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더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배우 톰 행크스 주연으로 2000년에 개봉한 ‘캐스트 어웨이’다.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아 무인도로 떠밀려 온 주인공은 비행기 화물이었던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주고, 말을 걸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인간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주인공에게 배구공 윌슨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어느 날 함께 뗏목을 타고 가던 윌슨이 바다에 빠져 멀어져 갈 때 주인공이 그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절대 고독에 처한 인간은 배구공과도 얼마든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배구공이든 로봇이든 인간이 다른 존재와 맺는 관계를 논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성능이나 외양이 아니다.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그토록 깊고 강렬한 관계를 맺는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영화 주인공이 배구공이나 로봇과 친밀하게 연결되는 것을 억지스럽지 않고 개연성 높게 표현하려면 극단적 사고로 인한 절대적 고립이라는 설정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파국을 맞은 세계에 홀로 남겨진 인간, 어떤 인간관계도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 처한 인간이 배구공이나 로봇과 소통하고 교감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기술을 상상하고 설계할 때 우리는 동시에 그 기술이 가치 있게 널리 쓰일 세상을 상상하고 검토해야 한다. 개연성 있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올트먼이 구상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녀’였던 것 같다.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편리한 기능을 활용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인간적 대상으로 삼아 깊이 교감하고 사랑할 것을 부추길 때 그는 어떤 처지에 놓인 인간을 상상하는가. 올트먼이 ‘그녀’의 후속작으로 고려하는 시나리오는 어떤 세상을 담고 있는가. ‘그녀’의 역할에 갇히지 않는 인공지능을 상상하는 새로운 시나리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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