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내 품을 떠나는 여름의 날들

2024. 5. 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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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모란과 작약의 계절이 지나면 곧 수국꽃 피는 계절이다. 수국꽃은 여름을 여는 신호와 같다. 벌써 이마가 데일 듯 한낮 땡볕은 뜨겁고, 머잖아 향기로운 여름 과일들이 쏟아져나올 테다. 기억 속 여름의 한 풍경. 때죽나무 위에서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댄다. 화단에는 키 작은 맨드라미가 있고, 껑충 자란 해바라기도 우두커니 서 있다. 어른들이 집을 비워 나 혼자 종일 심심했다. 뽕나무로 올라가 오디를 따먹었다. 까맣게 잘 익어 달콤새콤했다. 오디를 욕심껏 움켜쥐었던 손은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고, 셔츠 자락도 보랏빛 범벅이 되었다. 옷을 더럽혔다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실 게 분명했다. 밤늦게 지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내 옷을 보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시절의 동네에는 철공소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용접봉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파란 불꽃이 뱀의 갈라진 혀처럼 허공을 핥았다. 모루 위에는 제물처럼 달궈진 쇠가 올려져 있는데, 망치가 모루 위의 쇠를 두드리면 나는 쇳소리가 천둥소리 같이 퍼졌다. 세상의 강철들을 연마하는 모루와 망치들. 한여름의 철공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거기엔 모루와 망치의 합창, 후끈한 열기와 땀방울들이 있었다. 나는 심부름을 나왔다가 용접봉에서 나오는 파란 불꽃에 매혹되어 철공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여름의 철공소와 함께 나는 미처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꿈꾸곤 했다. 거기 번잡한 도시들, 낯선 기름과 향신료 냄새들이 후각을 찌르는 시장, 귀에 선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맛보지 못한 열대과일도 풍성할 테다.

여름은 나무들의 전성기다. 수목들은 무성하고, 식물 특유의 방향이 공중에 가득 떠돈다. 녹색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불면 챙캉챙캉 쇳소리를 내는 녹색 잎들, 활엽의 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산소,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들. 여름의 모든 것이 다 좋다. 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여름을 노래하는 시를 읽는 것도 좋다. '올여름의 할 일은/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 '여름의 할 일') 같은 싱그러운 싯구를 찾아 읽는 기쁨을 누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넓은 해변들//하얀 더위/푸른 강물//다시, 말라붙은 노란 야자나무들//여름에 잠자는 집에서/8월 내내 꾸벅 졸며//내가 붙잡았던 날들,/내가 잃어버린 날들//딸애들처럼 웃자라서/내 팔을 빠져나가는 날들'(데릭 월컷 '한여름, 토바고'). 오,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팔을 빠져나가는 여름의 날이라니! 여름이 없었다면 이토록 많은 여름의 시들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어느 해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고 작가의 무덤이 있다. 올리브와 무화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그 섬을 찾아갔다. 끼니때가 되면 해변가 식당을 찾아가 오징어 튀김과 해산물, 갓 구운 신선한 빵, 짭짤한 올리브 열매,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양파와 양상추, 체다치즈를 곁들인 요리를 먹었다. 바다에서 쾌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숙소로 돌아오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여름은 파란 바다와 흰 모래가 빛나는 계절, 긴 셔츠와 반바지의 계절이다. 여름은 여름이라서 모든 게 좋았다. 여름 저녁엔 식구들과 찐 옥수수·복숭아를 먹는 일, 비 오는 날엔 쇼팽의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서른 몇 해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古城)에서 가곡을 부르며 향수로 눈시울이 적시던 찰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겪은 열일곱 살 여자애와의 첫 키스가 찾아온다. 다시 여름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뛴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는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죽는 이유를, 여름이 항상 좋았던 까닭을.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살아간다. 아는 것은 여름의 빛들이 내 인생을 스쳐간 영화(榮華)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사실뿐이다. 여름의 빛은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지나간 것은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다. 변성기 무렵 내 목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음치는 내 인생의 불운. 부모들이 돌아가신 뒤 나는 더 이상 가곡을 부르지 않는다. 오, 인생의 모든 여름들이여, 그 짧은 여름의 빛이여!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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