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에 가면 ‘살아 있는’ 역사가 있다 [사람IN]

문상현 기자 2024. 5. 3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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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놓인 작은 섬이다.

김여정 작가(49)는 보광동의 가파른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을 맴돌며 굴곡진 역사와 사람,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작가는 오랫동안 통역사와 국제관계 전문가로 일하다가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거쳐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 보광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를 찾아온 사람들은 좋든 싫든 보광동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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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이 주목한 이 주의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이야기에서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조점순씨(오른쪽)는 서울 보광동에서 평생을 살았다. 김여정 작가(왼쪽)에게 역사와 삶을 들려준 어르신 14명 가운데 보광동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다.ⓒ시사IN 박미소

서울 한복판에 놓인 작은 섬이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서 걸어서 10분 남짓. 서쪽으로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동부이촌동, 동쪽으로는 고급 주택이 모인 한남동을 두고 있지만 이곳 풍경은 다르다. 다닥다닥 붙은 키 작고 낡은 주택과 교회 사이, 가파른 오르막과 개미굴 같은 골목이 퍼져 있다. 오르막과 골목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빈 집과 빈 상점이 늘어간다. 오랫동안 지연되어오던 재개발 사업에 최근 속도가 붙으면서 이제 곧 사라지게 될, 서울 보광동(한남 3구역)의 풍경이다.

1904년 일본은 용산·평양·의주 세 곳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용산 기지가 보광동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남겨진 상흔은 한국전쟁으로 더 깊어졌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진 자리에서 죽창과 주먹으로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 기지가 들어서자 이주민과 피란민이 몰려들어 새 터전을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보광동에 외국인 이주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하며 서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가 형성됐다.

김여정 작가(49)는 보광동의 가파른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을 맴돌며 굴곡진 역사와 사람,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보광동 이야기를 담은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으로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고, 아시아 지역 학살 사건과 그 유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기록한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로 제28회 전태일문학상 르포 부문 상을 받았다. 김 작가는 오랫동안 통역사와 국제관계 전문가로 일하다가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거쳐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 보광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를 찾아온 사람들은 좋든 싫든 보광동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인정에 모여 영어로 대화하고 미국 CNN 방송을 보는 미군 막사 ‘하우스보이’ 출신 어르신들부터, 다문화 가정, 성소수자 등 보광동 곳곳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들이 꺼내놓은 상처와 추억들을 기록했다. 김 작가는 “보광동 귀신이 들려서 책을 쓸 생각을 했던 것 같다”라고 웃었지만, 그의 글에는 재개발 사업(한남3구역)을 앞두고 카페를 찾아온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의무감이 잔뜩 묻어 있다.

김 작가는 보광동을 떠났지만 지금도 용산에 머물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집중 폭격을 당한 용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정리해 글을 쓴다. 6월 중순께 마무리할 계획이라 이제 막바지 작업 중이다. 김 작가는 “문서로 남아 있는 역사가 아니라, 직접 만나고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 중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남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아픈 목소리를 활자로 남기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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