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프랑스 대표 작가들 번역하려 출판사 차렸어요” [책&생각]
페렉, 에르노, 모디아노, 뒤라스…
출간 욕심에 출판사 ‘레모’ 차려
“‘프랑스 문학 전문’ 수식어에 책임”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불문학 석사를 거쳐 파리8대학에서 박사를 밟을 때까지 그는 늘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에게 매료되었다. “어차피 작가들이 하는 얘기들은 다 똑같잖아요.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다를 뿐이죠.” 조르주 페렉, 아니 에르노, 파트리크 모디아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기억과 관련된 서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분투한 작가들이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이들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출판사 문을 두드렸지만, 번역가로 진입하는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대중적인 작가들은 이미 고정으로 맡고 있는 번역가들이 있었고,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들은 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렸다. 윤석헌 번역가가 2017년 출판사 ‘레모’를 차린 배경이다. 레모(les mots)는 프랑스어로 ‘단어’ ‘낱말’의 복수형이다.
레모는 비강의 ‘충실한 마음’ ‘고마운 마음’, 페렉의 ‘나는 태어났다’, 에르노의 ‘젊은 남자’, ‘여자아이 기억’ ‘얼어붙은 여자’,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등 18종의 책을 출간했다. 윤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도 있고, 다른 번역가들에게 맡긴 작품들도 있다.
번역을 하면서 그의 번역관은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에는 원문 중심 번역을 지향했어요. 작가의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작가가 한 문장으로 썼는데, 그걸 두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죠. 하지만 번역가란 존재가 무엇이고, 번역을 왜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쌓이면서 결국은 독자 중심 번역으로 변해가더라고요. 번역은 결국 읽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독자가 읽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이제 초고는 원문에 충실하게 하고, 퇴고는 독자를 생각하며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번역가의 중요한 자질은 ‘의심하기’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오역을 피할 수 있어요. 내가 ‘안다’고 확신하면 사전을 덜 찾게 되고 실수하게 되거든요. 요즘은 인터넷, 유튜브 등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열심히 찾아보고 확인하면 오역을 줄일 수 있어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오역에 대해선 관대할 수 있지만, 지금의 오역은 자만이나 게으름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항상 조심하고 있어요.”
출판 이력이 쌓이면서 출판관도 확장되고 있다. 문학으로 출발했지만, 사회현상을 다루는 작품과 철학, 과학, 음악 에세이 등으로 출간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는 원서를 2페이지만 읽고선 계약했단다. 이 작품은 가정폭력과 여성살해를 다룬 작품으로 실화를 다큐처럼 그리고 있다. “프랑스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죠. 이런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지만, 아직 소설로 다루어지지 않은 소재를 썼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해요.”
출간 영토가 확장되고 있지만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늘 생각합니다. 왜 출판사를 차렸는지에 대해서. 출판사를 소개할 때마다 ‘번역에 진심인 프랑스 문학 전문 출판사 레모입니다’라고 말하거든요.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싶고 계속 그 이름에 맞게 일하고 싶어요.”
매주 화요일 ‘프랑스 문학 원서 읽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10여명이 1권을 4∼5개월씩 깊게 천천히 읽어나간다. 지금까지 에르노의 ‘젊은 남자’와 ‘자리’, 카뮈의 ‘이방인’ 등을 읽었고, 지금은 뒤라스의 ‘연인’을 읽고 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는 사람, 프랑스어는 알지만 문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 등이 어우러져 함께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한다. 매주 수요일에는 ‘레모 공역 프로젝트’를 1년반째 운영하고 있다. 10여명이 함께 카뮈의 단편집을 번역하는 프로젝트다. 각자 맡은 분량을 번역한 뒤 이를 공유하고 서로의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더 나은 번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굉장히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였다”며 “내년쯤 책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북토크를 많이 하는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출간한 책들을 두고 독자들과 40차례 정도 만났고,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에서 독자들과 책을 함께 읽는 모임도 진행했다. “이 모든 게 출판사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며 “다행히 ‘레모’ 하면 ‘프랑스 문학 전문 출판사’로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책과 문학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알리려 출판사까지 차리다니, 남다른 소명이 있을까 물었지만, “그저 재밌어서 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농담 삼아 ‘우울할 땐 번역’이라고 말을 해요. 기분이 별로일 때 더 번역을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재미있어요.”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충실한 마음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프랑스의 밀리언셀러 저자 델핀 드 비강이 인간관계에 대해 내놓은 소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작가가 오랫동안 품어온 개인과 가족 또는 사회에 연결된 다양한 형태의 충실함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윤 번역가는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추천했다.
델핀 드 비강 l 레모(2019)
고마운 마음
“고마운 마음이란, 타인에게 빚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빚을 소중한 관계의 형태로 여기는 것이다.” 팔십대 노인의 삶을 통해 ‘고마움’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설이다. 윤 번역가는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나이듦과 돌봄을 성찰하고,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누군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고 평했다.
델핀 드 비강 l 레모(2020)
사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자, 자신의 임신중절 체험을 리얼하게 다룬 작품이다. 윤 번역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에르노 특유의 문학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며 문학의 효용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읽기를 권한다”고 밝혔다.
아니 에르노 l 민음사(2019)
나는 태어났다
실험적 글쓰기로 유명한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 글들과 자서전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모았다. 페렉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안내서이자 그의 작품 세계의 이면을 탐험할 수 있는 열쇠와도 같다. 윤 번역가는 “자서전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으로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조르주 페렉 l 레모(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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